[르포] 영하 26.9도 겨울왕국…북극한파 몰아닥친 철원

입력 2018-01-27 08:10
수정 2018-01-27 08:22
[르포] 영하 26.9도 겨울왕국…북극한파 몰아닥친 철원

소주병·세차기 얼어붙고 맥주병 터져버려…한탄강도 '꽁꽁'

외출 묶인 주민 발 동동…토교저수지 겨울 절경 동호인 '북적'

(철원=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이런 날씨에 맥주병 박스를 밖에 내놓으면 바로 얼어 터집니다."



26일 아침 기온이 영하 25.2도까지 떨어지며 냉동고 추위를 보인 강원도 철원군의 한 주류 도매창고 직원이 얼어 터진 맥주병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하소연했다.

그는 "맥주병은 영하 10도 정도에도 터져버려 실내에 보관한다"며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작업을 이어갔다.

그 옆에 상자를 가득 채운 소주병들도 연일 닥친 혹한에 고체상태로 얼어붙었다.

얼음이 된 소주는 깨진 병 밖으로 나와도 병 속에 있던 제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주류 도매창고 직원은 "소주는 맥주보다 더 낮은 영하 17도가 넘어가야 얼기 시작한다"며 "오늘 같은 추위에는 소주나 맥주나 꽁꽁 얼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창고 구석에서 볕을 쬐던 강아지들은 추위를 버티기 힘들어 금세 어미 품을 파고들어 젖을 찾았다.



계속된 한파에 '겨울공화국' 철원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은 모습이다.

특히 민통선 마을인 김화읍은 기온이 영하 26.9도까지 곤두박질쳤다.

매년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는 예사로 내려가는 철원은 전국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알려졌다.

이곳 주민들은 수도관이나 보일러 동파 등에 대한 대비가 어느 지역보다 철저하지만, 재난 수준의 한파를 막기에는 힘에 겨워 보였다.

찬공기가 고이는 분지인 데다 북쪽은 평야로 트인 지형 특성상 추위가 지속해 매년 한파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 하루 철원군청에 접수된 수도계량기 동파사고는 10여건이지만 신고되지 않은 피해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2일 내린 눈이 채 녹기도 전에 한파가 밀어닥쳐 철원읍으로 향하는 거리 곳곳은 빙판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영화 속 얼음왕국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시계는 정오를 가리켰지만, 자동차 계기판 온도계는 창밖 날씨가 영하 17도라고 알렸다.



역대 최강 한파는 철원 사람들의 발걸음도 얼어붙게 했다.

전통시장은 손님 발걸음이 뜸했고, 상인들도 두꺼운 외투에 담요까지 두른 채 텅 빈 가게를 지켰다.

좌판 위 생선과 상인의 볼은 함께 얼어 갔고, 뜨거운 김을 내뿜는 분식집 어묵꼬치 앞만 손님들로 붐볐다.

동송읍 인근 한 주유소는 자동 세차기가 얼어붙어 손님들이 다시 핸들을 돌려야 했다.

강력한 한파는 철원을 굽어 흐르는 한탄강 풍경도 바꿨다.

지난주 평년보다 따뜻한 기온에 녹아버린 강이 나흘 만에 30㎝가량 두께로 얼어붙었다.

유속이 느린 가장자리뿐 아니라 한가운데까지 얼면서 때마침 한탄강을 찾은 관광객들은 폭이 30m가 족히 넘는 강을 들판처럼 걸어서 건넜다.



미세먼지를 밀어내고 강추위와 함께 펼쳐진 맑은 하늘은 생태사진작가들을 철원으로 불러모았다.

토교저수지 인근에 마련된 철새 관측소에는 커다란 망원렌즈와 전문가용 카메라를 삼각대로 받친 사진작가와 동호인들로 붐볐다.

두 눈만 빼고 온몸을 모두 감싼 작가들은 휴대용 보온기구와 컵라면 등으로 추위를 녹이며 한겨울 절경을 렌즈에 담았다.

저수지 너머로는 두루미, 재두루미, 큰고니, 물닭 등이 옹기종기 모여 혹한을 견뎠다.

불어대는 칼바람을 피해 철원을 떠나는 길에 만난 직탕폭포의 거대한 물줄기는 시간이 멈춰진 듯 거대한 얼음덩이로 변해 있었다.



이번 한파는 철원뿐 아니라 강원도 전역을 벌벌 떨게 했다.

춘천시 소양3교 등 강가에는 새벽부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상고대가 피어오르길 기다리던 시민들이 중무장 차림으로 모여 발을 굴렀다.

연일 이어지는 한파에 발목이 잡힌 강원도 주민들은 크고 작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춘천 사농동에 사는 주부 남모(35)씨는 택배로 받은 물티슈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추위는 주말을 지나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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