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눈과 얼음 세상에서 빙하시대 만끽하다
(연천=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근래 보기 드문 최강 한파가 연초에 몰아쳐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대표적 구석기 유적지인 경기도 연천의 전곡리에는 신바람이 쌩쌩 불었다. 30만 년 전 빙하기로 떠나는 눈과 얼음의 축제. 이곳 선사유적지에서 펼쳐진 ‘2018 연천 구석기여행’은 모처럼의 강추위 덕분에 여느 해보다 신명 나는 축제 한마당이 됐다.
"우가! 우가! 우가! 우가!"
널따란 노천 구릉지에 아이 원시인들의 의성어 함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열 살이나 됐을까? 여섯 명의 아이들은 제 키만한 사냥용 나무창을 하나씩 움켜쥔 채 일렬로 당차게 행진한다. 갑작스레 이뤄진 즉석 퍼포먼스!
바로 옆에서는 고기 굽는 장작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저만큼에서는 공룡, 고래 등의 눈 조각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아이들의 행렬을 빤히 바라보는 듯하다.
주변을 에워싼 관람객들은 '잘한다!'는 외침과 함께 웃음과 박수를 보낸다. 이에 더욱 신바람이 난 아이 원시인들의 함성도 한껏 커져간다.
"우가! 우가! 우가! 우가!"
저 멀리 축제 무대에선 청년 '전곡리안'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돼 눈길을 모은다. 덥수룩한 머리에 짐승 가죽옷으로 분장한 이들 전곡리 구석기인도 나무창을 야무지게 꼬나쥐고서 괴성 같은 원시 의성어로 방문객들에게 말을 건다. 축제장은 어느새 아득히 멀고 먼 빙하기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어 간다.
◇ 구석기 겨울 세상에서 신나게 놀다
한탄강 유역에 자리한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는 국내의 대표적 구석기 유적지다. 1978년 이곳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 넉 점이 우연히 발견돼 '동아시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는 기존의 서구 우월주의적 구석기문화이원론을 완전히 뒤집었다. 올해는 그 40주년이어서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구석기 빙하시대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2018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이 지난 1월 13일 눈과 얼음의 은빛 세상인 전곡리 유적지에서 공식 개막했다. 올해로 4회째인 이번 축제는 '겨울 연천에서 신나게 놀자'라는 슬로건 아래 2월 4일까지 23일간 계속된다.
연천군의 대표축제인 '연천 구석기 축제'가 1993년부터 매년 5월 초에 열려 따뜻한 봄날에 구석기 문화와 생활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면, 2015년 시작된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에 개최돼 빙하시대의 생활상 체험과 함께 다양한 겨울놀이를 즐기게 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상징 캐릭터인 고롱이와 미롱이가 입체 눈조각으로 서 있는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눈과 얼음의 세상이 은빛 미소로 방문객을 반긴다.
거대한 공룡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생생하게 조각된 '공룡의 세상'을 비롯해 용과 마녀 등이 신비감을 더하는 '환상의 세상', 곰과 물개 같은 야수들이 꿈틀대는 '동물의 세상', 인간과 주먹도끼 모습이 병풍처럼 펼쳐진 '구석기 세상', 커다란 황금개가 소망지들에 둘러싸인 '소망의 광장'이 바로 그것. 근처의 '얼음연못'에 가면 높다란 얼음기둥들이 거인처럼 우뚝우뚝 서 있다.
축제장에서는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기다란 노천 화덕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구석기 바비큐장, 길이 100m의 대형 눈썰매장과 70m의 스노보트장, 어린이와 유아용 썰매장, 열기구 체험과 빙어잡기 체험 등등. 대형 이글루에서는 원시인의 생활상을 직접 느껴볼 수 있고, 비누로 주먹도끼를 만들어보는 선사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 타임머신 타고 30만 년 전으로!
빙하시대를 모티브로 한 구석기 겨울여행 프로그램 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대형 눈조각품의 행렬이었다. 인간과 짐승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진 원시의 생활상을 거대한 눈 조각으로 재현해 방문객들에게 흡사 환상의 동화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듬뿍 안겨줬다.
선사관리사업소 관계자는 "국내 최대의 눈 조각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30명으로 구성된 조각팀이 참여했다"며 "지난해 12월 1일부터 한 달여 동안 2만5천t의 물로 눈을 만들어 보름 동안 조각작업을 시행했는데 천우신조로 11월 말부터 영하기온이 계속돼 더욱 멋진 작품을 연출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얼빈 빙등축제를 연상케 하는 생생한 모습의 눈 조각에 방문객들은 탄성을 멈추지 않았다. 환상의 동화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정경이어서인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유난히 많이 띄었다.
'공룡의 세상'에서 만난 이주원(성남·5) 어린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웅장한 공룡 조각품을 찬찬히 바라보는 이 양은 "야, 신기하다!"를 연발하며 순진무구함을 그대로 나타냈다. 그리고 잠시 뒤 "안녕! 빠이빠이! 또 보자"라며 공룡에 손을 흔들어 주변 구경꾼들의 입에서 "귀엽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바로 옆의 '소망의 광장'에는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맹수처럼 당차게 앉아 있는 황금개 조각품 주위로 새해 소원을 적은 소망지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남실댔다. 가장 많은 소원은 역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라는 글귀에다 '2018년에는 키 좀 크게 해주세요' '실수로 임금 10배 오르게 해주세요' 등 재치 넘치는 문구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손과 불의 혁명이었던 구석기 시대를 체험하는 또 다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은 바비큐 먹기.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드넓은 야외 벌판에 8개의 대형 화덕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가운데 방문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참나무 장작불에 돼지고기 등을 굽느라 신바람이 났다.
인근의 포천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왔다는 김민선(11) 양은 "공룡(조각품)이 있는 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니 마치 원시인이 된 것 같아요"라며 말랑말랑 잘 익은 고기를 자근자근 씹은 뒤 단숨에 꿀꺽 삼켰다. 옆자리의 안병준(의왕·49) 씨도 "이렇게 넓은 야외공간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긴 참으로 오랜만이다"면서 "아이들이 맛있다니 내 기분이 덩달아 더 좋아진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토층전시관'에서 진행된 구석기 고고학 아카데미와 '동굴마을'에서 실시된 구석기 동굴벽화 그리기, '석기제작소'에서 마련된 비누 주먹도끼 만들기 등 선사체험 또한 눈길을 끌었다.
이 가운데 비누 주먹도끼 만들기 체험장에서 만난 60대 초반의 안경랑(서울) 씨. 돌칼로 비누 주먹도끼를 정성스레 깎아가던 안 씨는 "손재주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는데 주먹도끼가 생각처럼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면서도 "태고시대의 문화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어 무척 좋다"고 말했다.
◇ 스릴 넘치는 눈썰매로 설빙세상 만끽
겨울축제의 주역은 역시 눈과 얼음이다.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에서도 눈썰매장과 스노보트장이 인파로 연일 북적거렸다.
특히 '구석기 세상'과 '환상의 세상' 사이에 설치된 대형 눈썰매장은 씽씽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리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이용자들로 온종일 활력이 넘쳤다. "준비!" "출발!" 하고 외치는 진행자의 신호에 따라 둥근 튜브를 탄 채 빙글빙글 돌며 110m의 슬로프를 미끄러지는 쾌감이 그만인 것.
경기도 파주에서 온 강석문(43) 씨는 "아내, 아들과 함께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을 찾았다"면서 "썰매를 타노라면 눈벌판에서 놀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뭉클해진다"고 감회를 나타냈다.
눈벌판을 더욱 신나게 즐기는 주인공은 아무래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었다. 혹은 친구와 함께, 혹은 가족과 함께 썰매를 들고 길게 늘어선 대기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들 어린이는 한결같이 "재밌다!" "하나도 안 무섭다!"며 그저 싱글벙글하였다.
아이들이 즐거우면 어른들의 기분도 덩달아 흐뭇해지기 마련이다.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손주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던 한 할머니는 "이게 바로 사는 재미인가 봐요!"라며 다가오는 손주를 두 팔로 덥석 안아 올렸다.
이밖에 40m 길이의 얼음썰매장과 유아들을 위한 유아썰매장, 비료포대로 즐기는 눈성미끄럼틀도 아이들에게 재미난 놀이터가 돼줬다. 고드름터널과 얼음기둥, 얼음폭포, 얼음의자가 설치된 얼음연못 또한 이색 볼거리로 인기를 끌었다.
행사를 주최하는 연천군의 김규선 군수는 개막행사 인사말을 통해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은 30만 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혹한의 겨울을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온몸으로 체험해볼 수 있는 축제마당"이라면서 "조상들의 구석기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올해까지는 주간 중심으로 축제를 운영하고 내년부터는 야간 개장도 검토하겠다는 게 주최 측의 구상이다. 이를 위해 눈 조각을 중심으로 한 야간 조명을 올해 처음으로 밝혀 설빙세상의 또 다른 환상미를 연출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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