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신당동 떡볶이

입력 2018-02-13 08:01
[연합이매진] 신당동 떡볶이

값싸고 푸짐하고 매콤달콤한 '국민 간식'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가스버너에 얹혀진 검은색 프라이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 안에서는 동그란 육수 거품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가래떡, 어묵, 쫄면, 라면, 군만두 등 다양하고 풍성한 식재료들의 향연장.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넘어간다. 식당 주인이 문득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정성스레 손을 보탠다.

"음식이 끓어오를 때 이렇게 국자로 잘 휘저어서 고루고루 섞어주면 좋아요! 들어간 정성만큼 맛이 더해지거든요."

"손님은 우리 식구나 다름없다"며 친근하게 미소 짓는 이 여주인의 얼굴에서 훈훈한 인심이 느껴진다. 이에 화답하듯 냄비 속 식재료들은 고추장 등 양념 소스와 뒤섞여 붉은 색조로 잘도 어우러져 간다. 맛깔나는 떡볶이 밥상의 풍경이다.

◇ 60여 년 역사의 서울 대표 음식

영험한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었다는 서울 신당동. 19세기 말 갑오개혁 때 한자만 바꾸어 신당(新堂)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곳에 가면 떡볶이 전문식당이 즐비한 '신당동 떡볶이 타운'을 만날 수 있다. 지하철 신당역의 7번과 8번 출구에서 지척인 이곳에는 10개의 떡볶이 식당이 도로 양쪽에 나란히 들어서 있다. 국내 유일의 떡볶이 전문 먹자골목이다.

'신당동' 하면 '떡볶이'가, '떡볶이' 하면 '신당동'이 먼저 떠오를 만큼 둘 사이는 막역지우처럼 무척이나 긴밀하다. 신당동 떡볶이가 떡볶이 음식의 대명사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신당동은 언제부터 떡볶이와 이토록 깊은 인연을 맺었을까?

거리의 초입에 있는 식당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는 그 내력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간판에 나란히 쓰인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와 '이젠 며느리도 알아요'라는 알듯 말듯 위트 섞인 문구가 바로 그것.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인 이 식당의 역사는 1953년 마복림 할머니(2011년 타계)가 시작해 며느리 전순자(74)·김선자(64)·이순자(65) 씨를 거쳐 손녀 박은순(42) 씨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마복림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신당동 골목에 떡볶이 가판대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 무척이나 배고프던 시절. 남편과 미군 물품 보따리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짜장면에 떨어진 떡을 어느 날 우연히 맛보고는 홀딱 반해 고추장과 춘장을 일정 비율로 섞어 떡볶이 요리에 나섰다. 춘장은 짜장면에 들어가는 중국식 된장이다.

미군 부대에서 배급받은 밀가루로 작고 가는 가래떡을 뽑은 뒤 고추장, 춘장을 넣어 볶아 팔았던 떡볶이는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1970년대 초에 지금의 떡볶이 골목이 생긴 데 이어 80년대에는 식당마다 DJ박스를 설치해 신청받은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며 새로운 시대 문화 창출에 일조했다.

고교야구가 인기를 누리면서 인근 동대문운동장에서 야구 관람을 마친 학생과 시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배를 채울 수 있는 이곳으로 줄줄이 찾아들었다. 당시 젊은 시절을 살았던 노장년층이 옛 향수를 떠올리며 오늘날 떡볶이 거리를 즐겨 찾는 배경이다.



◇ 치즈떡볶이 등 파생메뉴 잇달아

떡볶이 골목을 걷노라면 식당 안팎에 줄줄이 새겨놓은 메뉴들이 눈에 들어온다. 떡볶이 요리를 대표하는 명칭이 돼버린 신당동떡볶이 외에 해물떡볶이, 치즈떡볶이, 짜장떡볶이 등 파생메뉴가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눈물떡볶이, 열불떡볶이, 궁중떡볶이 같은 메뉴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뭘 먹을까? 길손들로선 선택의 고민에 잠시 빠져드는 행복의 순간!

대표 음식은 역시 신당동떡볶이다. 가늘게 뽑아낸 떡볶이 가래떡과 함께 어묵, 쫄면, 라면, 군만두, 계란이 주재료로 들어간다. 초창기에는 밀가루가 들어간 떡을 사용했으나 요즘은 쌀로만 빚는다. 식당에 따라 계란을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한다. 소스 또한 식당마다 조금씩 달라 그만큼 맛의 개성이 느껴진다.

파생 떡볶이 음식들은 이 신당동떡볶이 메뉴를 기본으로 삼는다. 해물떡볶이는 콩나물, 팽이버섯에다 새우 등 각종 해물을 넉넉히 추가하고, 치즈떡볶이는 팽이버섯에다 치즈 떡과 치즈를 별도로 넣는다. 짜장떡볶이는 춘장으로 시작했던 초창기의 떡볶이를 떠올리게 한다.

주문을 받으면 이들 음식은 육수가 더해져 손님 밥상의 가스버너에 올려진다. 육수는 파, 무, 다시마, 멸치, 황태, 새우 등 부재료들로 삶아낸 것. 고추장과 춘장이 일정 비율로 섞인 소스도 합세한다. 각종 식재료와 양념류가 조화를 이뤄 탄생한 별미가 바로 떡볶이 요리다.

"떡볶이가 맛이 있으려면 불 조절도 중요해요. 식재료와 육수가 담긴 냄비에 가스 불을 지펴 팔팔 끓인 다음 고루고루 잘 저어줘야 하지요. 웬만큼 익었다 싶으면 불을 졸여 은근한 열기가 가해지게 하고요. 이렇게 잘 뒤섞이고 잘 익은 떡볶이를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치즈떡볶이를 만들 땐 치즈를 육수가 끓을 때 넣어줘야 해요. 일찍 넣으면 치즈가 냄비 바닥에 눌어붙기 쉽거든요."

신당동 떡볶이 식당 중 하나인 '아이러브신당동'의 조정숙(63) 대표는 떡볶이 재료와 요리법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조 대표는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최순기·83)와 함께 떡볶이 장사를 해오면서 동생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키워왔다"면서 "저와 제 식구들의 오늘이 있게 해주고 지금도 우리 가족이 직접 먹는 음식인 만큼 더욱 성심껏 요리하려 애쓴다"고 말했다.

떡볶이 음식의 가격은 식당마다 다소 차이가 나나 1만원대에 두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저렴한 편이다. 신당동떡볶이의 경우 2인 한 상에 1만1천원이며 떡과 계란이 추가된 3인 상은 1만4천원, 떡과 계란에다 어묵, 라면까지 더한 4인 상은 1만9천원에 지나지 않는다.

짜장떡볶이도 이와 비슷한 가격대. 다만 해물떡볶이, 치즈떡볶이 등 다른 요리는 대·중·소로 나뉘되 '아이러브신당동'의 경우 소짜 1만7천원, 중짜 2만원, 대짜 2만5천원에 먹을 수 있다. 떡볶이를 다 먹은 뒤 밥과 김 가루를 넣어 볶으면 그 맛이 금상첨화. 반찬은 단무지 하나로 지극히 단출한 편이나 떡볶이 음식 자체가 워낙 풍성해 부족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 "학창시절 추억 떠올라요"

떡볶이 음식은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중음식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특히 신당동떡볶이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당시 청춘 문화를 선도하는 데 일조했다. 맛있고 다양한 떡볶이 요리를 값싸게 즐기면서 7080세대의 향수에도 젖어볼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광화문 근처에 있던 당주동의 옛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곤 했어요. 그때가 그리우면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와서 떡볶이를 찾는답니다. 달면서도 매콤한 맛이 그만이거든요!"

1월 초순의 평일 낮, 신당동떡볶이 식당에서 만난 여고동창 박미숙(63)·정희분(63) 씨는 "그 시절 떡볶이 식당에서 떡볶이도 즐기고 음악도 감상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면서 "이곳에 오면 맛도 맛이지만 그 분위기에 얼마만큼 젖어볼 수 있어 좋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당동떡볶이 식당 중 DJ 음악과 라이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은 현재 '아이러브신당동'이 유일하다. 이 음식점에서는 정오부터 DJ의 사회로 음악과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저녁 7시와 9시, 11시에는 통기타 그룹의 라이브 공연도 펼쳐진다. DJ 김상우(50) 씨는 "1980년대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져왔다"며 "10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음식과 음악을 흡족하고 편하게 즐기는 손님들의 표정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식당의 한쪽 식탁에서 아빠와 함께 떡볶이 맛에 흠뻑 빠진 임세훈(11) 군과 임세연(9) 양은 "짜장 떡볶이가 좋아서 시켰어요. 고소해서 더 맛있어요"라며 바지런히 젓가락질을 한다. 20대 때 먹었던 신당동 떡볶이의 맛을 잊지 못한다는 아빠 임상규(42) 씨도 "청춘 시절이 그리우면 한 번씩 들른다"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니 저 역시 만족감이 더해진다"고 흐뭇해했다.

전라도 광주에서 동갑내기 직장 동료와 같이 왔다는 옆 테이블의 이정우(27) 씨도 떡볶이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매운맛과 단맛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 참 좋아요! 서울에 올 때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꼭 찾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일까요? (웃음) 같은 떡볶이를 먹어도 본고장에서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지나 봅니다."

'국민 간식'이자 먹을거리인 신당동떡볶이는 보통의 떡볶이와 달리 춘장이 들어가 외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중국인과 일본인 등 아시아인들을 중심으로 이곳 떡볶이 골목을 많이 찾는 이유다.



◇ 예전만 못한 업황…제2 전성기 올까

한때 신당동에는 41개의 떡볶이 식당이 성업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업황이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이는 전반적인 경기 부진과 음식문화의 다양화 등 변화한 시대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떡볶이 업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형화와 신메뉴 개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 집은 할머니가 타계한 뒤 세 며느리가 힘을 모아 운영하고 있고, 공동대표 법인체제인 '아이러브신당동'은 2002년에 무려 일곱 개의 업소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대형화한 곳이다.

신당동 떡볶이 거리축제는 2000년 무렵부터 매년 가을 열리는 볼거리이자 즐길 거리였다. 축제 기간에는 100m 길이 떡볶이 떡 요리해 나눠 먹기, 떡볶이 요리 경연대회, 매운 떡볶이 빨리 먹기 대회, 7080 콘서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방문객들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내부 사정상 열리지 못했다.

신당동떡볶이상가상우회 이윤근 전 대표는 "소비문화 변화 등 급격한 시대 흐름에 따라 과거에 비해 방문객들이 줄어든 게 사실"이라며 "업소들이 좀 더 단합해 적극적인 대응책을 함께 마련함으로써 제2의 전성기가 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2월호 '음식기행'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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