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폐교 위기 학교에 알록달록 희망 칠하는 '키다리 아저씨'
열악한 시골학교 환경 보고 페인트칠 결심한 '도색 기부천사' 김재식씨
5년간 학교 10곳 색칠…도색 후 전교생 10명→20명 폐교 위기 벗어나기도
(강릉=연합뉴스) 박영서 기자·용지수 인턴기자 = "아이들은 잘못이 없잖아요. 시골을 외면한 어른들 때문이지. 근본을 소중히 여겨야 대의를 보게 되는 것처럼 힘 닫는 데까지 도색 기부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폐교 위기에 내몰린 시골 학교를 찾아 알록달록 색을 입히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강원 강릉에서 페인트업체 대리점과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김재식(42)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작은 학교에 희망을 불어넣어 아이들 마음속까지 색칠하는 기부천사다.
2013년 양양 회룡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김씨가 옷을 갈아입힌 학교만 10곳에 이른다.
그는 주로 학생들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직원들과 함께 학교 내·외벽을 알록달록하게 칠한다.
월요일 등교하는 학생들이 김씨의 깜짝 선물을 보고 기뻐하며 껑충 뛰는 모습을 몰래 지켜볼 때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
김씨가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난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우연히 본 뉴스 때문이다.
"뉴스에서 폐교 위기 학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학생 수가 적은 낡은 학교는 나라에 시설물 보수를 요구해도 늘 무시당한다고 하더라고요. 학생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을 보고 도색 기부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직접 고향인 양양의 회룡초등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학교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암담했다.
마지막으로 보수공사를 한 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외벽은 허물이 벗겨지듯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학교 안으로도 곳곳이 낡고 녹슬어 군부대 막사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지원금이 부족한 분교는 폐교 위기 앞에 직면해 있었다.
애향심도 애향심이지만 학교가 없어지면 매일 1시간에 가까운 거리의 다른 학교를 걸어 다녀야 하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고 다짐한 김씨는 직업 특성을 살려 도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학교 특색에 맞게 디자인을 직접 설계했고 색상과 재질이 우수한 고급 페인트를 사용했다.
학교 상징이나 지역 역사와 관련된 일러스트도 그려 넣었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학교는 마치 현대미술 작품처럼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했다.
김씨가 학교에 칠한 것은 단순히 페인트가 아닌 희망이었다.
양양 송포초등학교는 그가 도색 기부를 하기 전까지 전교생이 10명에 불과해 한 자릿수로 접어들면 폐교 수순을 밟아야 하는 시한부 운명에 놓여 있었다.
김씨의 도색 기부 소식을 들은 교장 선생님이 그를 찾아와 "교육 커리큘럼도 좋고 참된 선생님도 많은 학교인데 살려낼 재간이 없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2016년 그는 2천500만원을 들여 외벽을 칠했고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인데 학생 수가 20명으로 늘어나며 기적처럼 살아났다.
김씨는 이때를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런 그의 발목을 잡는 건 늘 '돈'이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학교 도색에 2천만∼3천만원이 든다.
그가 지금까지 쓴 돈만 3억원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 합한다면 그의 기부는 값으로 매길 수 없다.
일부 학교에서는 없는 살림에도 비용을 보태주기도 하지만 대게는 김씨가 페인트값, 인건비 등 전액을 부담한다.
"저도 돈이 많아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걸로 홍보하려고 한다며 사기꾼이라더군요. 그런 말을 듣고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힘을 냅니다."
김씨의 선행을 돕고자 페인트업체 본사에서는 도색에 드는 페인트를 일부 지원하고 있다.
강원도교육청은 지난해 11월 28일 김씨에게 감사패를 주고 그의 부탁으로 통학버스가 없는 강릉 옥천초 운산분교에 교육청이 통합 운영하는 에듀버스를 지원했다.
연말에는 조금 쉴 법도 하지만 김씨는 지난달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선물 보따리가 아닌 페인트통을 짊어진 산타로 변했다.
그는 연휴 3일 내내 양양 인구초 임호분교 벽을 색칠해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으로 남을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사했다.
이제 어딜 가도 학교부터 눈에 들어온다는 '키다리 아저씨'.
그가 색을 입힌 학교에서 오늘도 아이들의 웃음꽃이 형형색색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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