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바꾸자] ④ '좀 쉬어갑시다'…만성 피로사회

입력 2018-01-01 08:30
[올해는 바꾸자] ④ '좀 쉬어갑시다'…만성 피로사회

지난해 1인당 평균 2천69시간 노동…OECD 평균보다 1.7개월 더 일해

"제도 개혁과 함께 내면화한 권위적 조직문화도 탈피해야"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황재하 기자 = 정부 산하의 한 연구기관에 재직 중인 최모(29)씨는 퇴근 시간이 되면 가방을 챙겨 직장 문을 나선다.

보고서 때문에 일이 많은 연말 등에는 종종 밤샘근무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런 걱정이 없다. 최씨가 자신의 직장을 '칼퇴(칼같이 퇴근)의 아이콘'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최씨와 같은 직장인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지만 이를 초과해서 일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최씨 같은 사람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천69시간으로 35개 OECD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길었다.

이는 가장 노동시간이 짧은 독일(1천363시간)보다 706시간 많고, OECD 평균(1천764시간)보다 305시간 많은 수치다.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한국인은 독일인보다 4개월 더, OECD 평균보다 1.7개월 더 일한 셈이 된다.

이러다 보니 한국의 직장인·아르바이트생 등 노동자들은 늘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 매일 자정까지 야근…휴일에도 근무하기 일쑤

공연 업계에서 일하는 A(38)씨는 휴일이 따로 없다. 공연·리허설을 위한 공연장 대관이 있으면 아침·저녁은 물론 주말과 휴일도 상관없이 일터로 나가 조명·음향 등 공연지원 업무를 해야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은 연말연시나 특별한 날이면 대관이 많아 휴일에는 쉬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그렇다고 대관이 없는 평일에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상시에도 일단 출근해 장비를 점검하는 등 자리를 지켜야 한다.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밀린 잠을 보충한다.

이렇게 일해도 야근 수당이나 휴일근무수당은 기대할 수 없다. 수당을 미리 다 포함해서 지급한다는 이른바 '포괄임금제'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내 주요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이모(29)씨는 매일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11시 30분에 퇴근한다.

이씨가 계산해보니 식사시간을 빼더라도 주당 노동시간이 70시간이었다. 매주 30시간씩 초과근무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초과근무수당은 매주 12시간 치만 지급한다. 법정 최대 노동시간이 주당 52시간이어서다.

이씨는 "이건 그나마 올해 들어 회사가 원가절감을 이유로 주말 근무를 없애고 평일 근무시간도 1시간 줄인 결과"라며 "주말 근무가 없는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자위하며 회사에 다닌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서는 수당이 2배 이상인 주말 근무는 없애고 평일 초과근무는 유지한 데 대한 불평도 있다고 한다.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B(27)씨는 퇴근은 주변 눈치를 안 보고 할 수 있지만, 퇴근 이후나 주말에도 거리낌 없이 카카오톡 등으로 업무 지시가 내려오는 통에 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고 호소한다.

심지어 자신의 직장을 '칼퇴근의 아이콘'이라고 했던 최씨의 직장에도 사실은 야근이 있다. 월급이 너무 적어 생활비가 빠듯한 탓에 직원들이 수당을 벌려고 야근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 "제도 개혁과 함께 내면화한 조직문화 바꾸는 노력 필요"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피로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제도 개혁, 노동자 조직화와 함께 내면화한 권위적 조직문화를 스스로 바꿔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이 이른바 '피로사회'가 된 원인은 기본적으로 일을 너무 오래 한다는 데 있다"며 "그 이유를 찾으려면 이런 문화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가장 큰 책임은 '경제권력'이라 할 수 있는 재벌·기업주라고 봐야 한다"며 "노조 조직률이 낮고 정치권에서도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는 이들이 없는 현실에서는 기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없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이어 "한때 유행했던 소위 '젊은 꼰대'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기업 내 관리자와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의 편의를 위한 권위주의적 조직문화를 내면화하는 것이 문제"라며 이들이 그러한 문화 속에서 하급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갑질'을 저지르는 것이 문제를 야기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도 이와 같은 '내면화'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경영자'라고 성공학 개론서가 강조하는 현대사회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주장을 폈다.

전 교수는 이런 피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부당노동행위를 철저히 감시하는 등 제도적인 노력은 물론이고, 이처럼 과로가 '일상화·내면화'한 조직 문화나 분위기를 탈피하려는 기업주와 노동자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omm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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