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회수 초상은 1833년 작품…조선인 그려진 최고 유화"
신민규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원, 학술지 '미술자료'에 논문 발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인 휴버트 보스가 1898년을 전후해 유화 기법으로 그린 '민상호 초상'보다 60여 년 앞서 제작된 조선인 유화 초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신민규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원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펴낸 학술지 '미술자료'에 게재한 논문에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인해 20세기 작품으로 알려졌던 박회수(朴晦壽, 1786∼1861) 초상의 제작 시기가 1833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신 연구원은 "박회수 초상은 중국에서 제작된 조선 사신의 초상화 가운데 서양인이 그린 것으로는 유일하게 전하는 그림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화 초상"이라고 강조했다.
반남박씨 경주공 종가가 소장해오다 지난 2011년 대전시립미술관에 기탁한 이 그림은 가로 52.8㎝, 세로 70.4㎝ 크기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단이나 종이를 발라 족자로 만든 뒤 말아서 보관하는 조선 초상화와는 달리 나무로 제작한 보호곽인 목감(木龕)에 초상화를 부착했다.
반신이 그려진 초상화 속 주인공은 사모(紗帽·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와 시복(時服·관원들이 입는 옷)을 착용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신 연구원은 논문에서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헌종 12년(1846) 9월 22일 기록을 제시했다. 당시 헌종과 대신들은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놓고 담화를 나눴는데, 이 자리에서 박회수는 "신이 몇 해 전의 연행(燕行·사신이 베이징에 가는 일) 때 양인으로 하여금 (초상) 그리게 했습니다. 온전히 기름만 사용해 그렸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기름기가 사라진 뒤에야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 연구원은 "박회수가 유화 안료가 마르면서 유분으로 인한 광택이 줄어들어 형상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게 됐다고 설명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신 연구원은 2014년 6월 미술품 경매에 등장한 또 다른 박회수 초상과 유화 초상 속 인물의 전체적인 인상과 수염이 자란 모습, 입 모양 등이 닮았다는 점에서 대전시립미술관 그림이 박회수를 그린 초상이 맞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유화 초상의 제작 시점을 1833년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회수는 1810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의릉 참봉을 시작으로 호조참판, 병조참판, 평안감사, 우의정, 좌의정 등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1833년부터 1849년까지 네 차례 연행을 다녀왔다.
신 연구원은 초상화에서 박회수가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차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학정금대는 종2품 관리가 차던 띠다. 박회수가 종2품 관직으로 연행을 했을 때는 1833년밖에 없다.
이지연(1777∼1841)은 1833년 연행 당시의 사정을 시로 남겼다. 이 시에는 "북쪽 러시아인과 서양인 모두 조회하지 않거늘/ 무슨 일로 연경(燕京·베이징)에 와 오래도록 머무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신 연구원은 "조선 사신들은 연경 곳곳에서 서양인이나 서양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라며 "조선 사신들이 천주당에서 주로 서양인을 만났지만, 박회수 초상을 그린 화가와 그림이 제작된 장소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면반신상은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5) 연간에 궁정화가들이 주로 그렸는데, 박회수 초상도 그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그림일 수 있다"며 "19세기 초반의 유화 초상은 중국에서도 예가 드물어 자료가 추가로 발굴돼야 면밀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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