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갈색 머리, 교칙에 맞춰 검게 염색해야 하나?
일서 학생이 소송 제기, "시대에 맞는 교칙" 논쟁 유발
외신 "일선 밝은색 머리가 죄" 보도도, 3자 협의회서 '투 블록' 두발 허용한 곳도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갈색 머리로 태어난 학생도 교칙에 맞춰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해야 할까?".
일본 오사카(大阪府) 부립(府立)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오사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계기로 교복과 두발 등 용모를 엄격히 규제하는 일본 중고교의 교칙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낡은 시대의 규칙과 지나친 단속의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고 있지만, 일정한 정도의 교칙은 필요하다며 옹호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교칙'은 뭘 말하는 걸까. 문부과학성은 "학생들이 건전한 학교생활을 영위하면서 더 잘 성장하고 발달해 가기 위해 각 학교의 책임과 판단으로 정하는 일정한 규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어린이와 보호자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시대의 진전"을 반영해 적극 수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전반에 걸쳐 당시 일본 문부성은 교칙과 학생지도방법을 시대에 맞춰 변경하라고 각 교육위원회에 요청했다. 1988년 시즈오카(靜岡)의 한 중학교에서 머리를 염색한 학생이 졸업앨범에서 제외되고 1990년 고베(神戶)의 한 고등학교에서 지각학생 단속 중 여자 학생이 교문에 끼여 사망한 사건 등이 배경이었다.
이번에는 9월에 제기된 오사카 부립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두발염색 강요 관련 소송을 계기로 불합리한 교칙과 규정들을 '블랙교칙'으로 부르며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학생은 2학년이던 작년 5월 "내가 원한 게 아니다. 타고난 머리가 갈색인데 왜 계속 야단을 맞아야 하느냐"고 가족들에게 호소한 적이 있다고 소장에 적었다.
중학교 때는 학교의 지도에 따라 학교행사 등이 있을 때 머리를 검게 염색했다. 그러나 고교 입학 후에는 학교 측이 두발 등 몸가짐에 관해 규정한 '학생의 마음가짐'을 이유로 원래의 머리색으로 돌아가게 두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머리가 상하고 두피에 통증을 느끼는 지경이 됐지만, 교사들은 염색이 불충분하다며 다시 하라고 명령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학교 측은 입학 당시 검게 염색했을 경우 "검은색을 유지하라"는 방침이었다. 학교 측의 지도를 따르지 않자 작년 9월 학교 측으로부터 "지도에 따르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학교에 가지 않게 됐다. 3학년이 된 올해 4월 이후에는 학생명부에서 삭제되고 교실에서 자리도 없어졌다. 대학에 진학하려던 목표도 이룰 수 없게 됐다.
변호인은 "학생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아붙여야 하느냐"며 분개했다. 오사카부는 소송에 맞서 법정투쟁을 계속한다는 방침이지만 변호인은 "타고난 신체 특징을 왜 바꿔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교육청이) 학생들 편에 서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이 소송은 외신에도 많이 소개됐다. 로이터통신은 "'조화'를 문화로 삼는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의 스커트 길이와 머리 색깔에 엄격한 교칙을 두고 있다"는 기사를 배포했다.
영국 BBC 온라인판은 "일본 학생들은 머리를 검게 염색하도록 강요당한다"는 제목으로 이 기사를 다뤘다. 영자 뉴스 사이트 중에는 "일본 학교에서는 밝은색의 머리털은 죄가 된다"고 비꼬아 보도한 곳도 있었다.
'검정염색'과 관련된 소송은 과거에도 있었다. 미야기(宮城) 현립 고교 출신의 한 여학생이 2005년 시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원고는 "타고난 붉은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도록 강요당했다"며 550만 엔(약 5천200만 원)의 배상을 요구, 현 당국이 "교육적 배려를 하지 못했다"고 사과하고 50만 엔을 지급하는 것으로 화해했다. 2008년에는 나라(奈良) 현의 한 시립중학교 출신의 여학생이 "검게 염색하도록 강요한 것은 체벌에 해당한다"며 시 당국을 제소했으나 오사카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교육적 지도 범위 내"라며 소송을 기각, 2013년 최고재판소에서 1, 2심 판결이 확정됐다. 이번 소송에 어떤 판결이 날지는 예단할 수 없다.
어쨌든 이번 소송을 계기로 비영리법인(NPO) 대표 등이 시작한 인터넷 청원운동 '블랙 교칙 없애기 프로젝트'에 많은 학생이 서명하고 있다. 이미 2만8천여 명이 서명해 참여했다.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이들은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문부과학상에게 '블랙교칙' 시정을 요구한다는 계획이다.
프로젝트 발기인이자 학습지원 MPO인 키즈도어 PO인 키즈도어의 와타나베 유미코 이사장은 "옛날 상식으로 만들어진 교칙이 고쳐지지 않고 있어 많은 어린이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 "사회 전체가 교칙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호소하고 있다.
오사카부 교육청도 이달 들어 두발뿐만 아니라 교칙 전반에 대해 점검하도록 부립 고등학교 전체에 지시했다. 소송을 계기로 실시한 지도실태 조사에서 일부 낡은 규칙이 그대로 남아있는 등 사회변화에 비추어 맞지 않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자 보호자와 지역의 의견을 수렴해 필요할 경우 수정한 후 교칙을 홈페이지 등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아사히신문은 '시대의 전진'을 반영해 교칙을 개정한 사례로 도쿄 세다가야(世田谷) 구에 있는 다이토가쿠엔(大東?園)고교를 소개했다. 2003년부터 교칙과 수업에 대해 학생, 보호자, 교직원 등이 참여하는 '3자 협의회'를 연 2회씩 열고 있는 이 학교는 지난 11월 말 협의회에서 귀 위까지의 머리는 그대로 두고 옆과 아랫부분은 밀어버리는 '투 블록'을 금지한 교칙에 대해 논의했다.
투 블록은 교칙에서 금한 "극단적인 두발 형태"의 하나였으나 학생들은 협의회에서 "별난 게 아니다", "청결감이 있다"며 교칙을 고칠 것을 제안, 학부모와 교시들도 이해해 허용하기로 했다.
10년 이상 전부터 3자 협의회를 운영하고 있는 오카야마(和歌山) 현 기노카와시 현립 고가와(粉河) 고교도 내년 초 협의회에 올릴 교칙변경 안건을 학생들에게서 접수하고 있다. 학생들은 수업 중 카디건을 입을 때 교사의 허가를 받도록 한 교칙을 고쳐 "허가제를 없애달라"는 안건을 제기했다.
이 학교 다카시 가오루 교감은 "요즘 학생들은 각자의 의견이 있어도 다 함께 이야기하는 걸 귀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절차를 밟으면 요구가 전달된다는 걸 배우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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