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스위스와 '거인' EU, 관계 재설정 힘겨루기 본격화
EU "재판관할권 등 인정 안하면 EU 금융시장 접근권 등 박탈"
스위스 "영국 탈퇴 이후 염두에 둔 부당한 차별…수용불가"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미니 국가' 스위스와 거대한 국가연합체인 유럽연합(EU) 간 관계 재설정을 위한 힘겨루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도리스 로이트하르트 스위스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스위스 신문 '존탁스블리크'와의 인터뷰에서 스위스와 EU 간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로이트하르트 대통령은 최근 EU와의 분쟁 상황을 언급하고 "대(對)EU 관계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를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면서 국민투표가 스위스의 기본 입장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EU 집행위원회가 내년 1월 3일 발효될 새 지침과 관련해 증권거래소 분야의 동등지위를 스위스에 1년만 더 허용하겠다고 밝히자 나온 반응이다.
EU의 이런 방침에 스위스 여론은 들끓고 있으며, 로이트하르트 대통령이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면서 국민투표까지 거론하며 격하게 반발한 것이다.
EU의 지침은 스위스 증권거래소의 감독 시스템이 EU 기준과 동일하다고 인정, 양쪽의 자유로운 거래를 허용하는 것이다.
EU가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스위스는 내년 12월 31일자로 이런 입지를 잃게 된다. 이 경우 스위스 증시에 투자된 자금의 대거 이탈이 뻔하며, 금융산업이 국내총생산의 9.1%를 차지하는 스위스 경제로선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EU 회원국이 아니다. 또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등은 비(非)EU 회원국이면서도 EU 28개국과의 통합된 단일 시장인 유럽경제지역(EEA)에 참여하고 있으나 스위스는 EEA 회원국도 아니다.
다만, 120여 종에 달하는 세부적인 무역 및 금융협정 등을 통해 '사실상' EEA 회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거대 EU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스위스는 대신 EU회원국이 내는 예산 분담금과 유사한 기여금을 EU에 내는 등 '성의'를 보여왔다.
이런 '동거 체제'에 문제가 계속 드러나자 양측은 기존 관계를 대체할 포괄적 기본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을 진행해왔다. 여기엔 무역과 금융뿐만 아니라 경찰, 사법, 세무 협력, 농업, 자유로운 국경 통과와 거주 등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스위스의 이민 쿼터 제한과 국경 자유 통과 유보 등으로 양측 간에 분쟁이 빚어졌으며, 국가 보조금과 EU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의 관할권 인정 문제 등을 둘러싸고 협상이 교착됐다.
이에 따라 EU는 "지난 3년간처럼 협상 마감시한인 내년 말까지도 타결 전망이 보이지 않는 데 대해 EU 회원국들의 불만이 쌓여 있다"면서 '그동안 밝혀온 것처럼'금융시장 동등지위를 내년 말까지만 적용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스위스 정부는 EU가 최근 미국, 홍콩, 호주 등에 EU 단일시장에 대한 무기한 접근권을 부여했음에도 스위스만 차별하는 행위라고 항의했다.
또 EU의 이번 조치엔 영국이 EU를 탈퇴한 뒤 스위스처럼 EU 시장에 진출하려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복선이 깔렸다면서 "영국도 스위스처럼 제삼자에 불과하므로 회원국처럼 공정하게 대접받기 어렵다"고 말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U의 이번 방침에 스위스 내에선 반발과 분노가 일고 있으며, 로이트하르트 대통령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긋고 나섰다. 동유럽권에 100억 유로 이상을 투자키로 했던 일도 철회할 수 있다고 EU에 경고했다.
반면 EU는 "증시 동등지위 문제는 예상된 조치로 놀라워할 일이 아니다"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EU에서 탈퇴할 영국이 스위스 편을 들어줄 길도 없다.
스위스는 국민 여론이 ECJ 사법관할권에 부정적인 데다 외국인 이민과 EU 등에 반대하는 극우 보수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원내 제1당이어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상황이다. 또 무역액의 66%를 차지하는 EU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로이트하르트 대통령이 "증시 지위 같은 기술적 사안을 기본협약 같은 정치적 문제와 연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장난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이 역시 정치의 일부이고 우리는 이것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 것에 '거인'을 상대하는 스위스의 고민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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