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70주년 맞는 '제주4·3'…평화·상생 일궈낸 역사

입력 2017-12-28 06:32
내년 70주년 맞는 '제주4·3'…평화·상생 일궈낸 역사

정명(正名) 찾기·유족 보상·수형인 명예회복 등 과제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국가폭력에 의해 수만명의 양민이 무고하게 학살된 '제주4·3'이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제주도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는 내년을 제주 방문의 해로 삼아 화해와 상생, 평화, 인권의 4·3 역사를 국민과 세계인에게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는 제주4·3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인명피해가 2만5천∼3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7년간 도민 인구 11%가량이 희생되는 참극이었다.



◇ 강요된 금기를 깬 진상조사

4·3의 광풍이 그친 1956년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자락 옛 일본군 탄약고 터. 야심한 밤 군경의 눈을 피해 유족들이 희생당한 채 방치된 132구의 일가족 시신을 수습했다.

1950년 여름 주민 140여명이 한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총살당한 지 6년 만에 일이다.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학살 사실을 은폐하려고 시신 수습을 막아 장기간 방치되고 말았다.

유족들은 수습한 시신을 한데 모아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도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묘비를 세우고 통곡했다.

4·3은 이처럼 강요된 금기 속에 반 세기가량 국가권력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됐다.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19 혁명으로 끝나자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나마 이뤄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 다시 빠지게 된다.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부터 금기는 깨지기 시작한다. 1949년 1월 조천읍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 집단학살을 다룬 순이삼촌은 제주4·3의 참혹한 진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드러냈다.

이후 1980년대 현길언·오성찬·고시홍 등 제주 출신 문인들이 4·3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대학가의 4·3 진상규명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1986년 4월 3일 제주대 총학생회는 학내에 4·3 분향소를 설치했고, 1년 뒤에는 진상규명을 하자는 주장을 담은 대자보들이 내걸렸다.

1988년에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도 서울 등지에서 공개적으로 4·3 학술행사를 열었다. '제주도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의 '제주도 현대사 재조명-4·3 배경과 경과' 학술행사와 일본에서 열린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의 4·3강연회가 대표적이다.

1989년 기점으로는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연합, 4·3 진상규명에 대한 열망을 대중적으로 끌어올렸다.

제주여민회, 제사협, 제주지역총학생협의회 등 사회·문화·학생단체들은 '제주4·3 추모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그해 4월 3일을 전후해 '사월제'를 열었다.

4월 3일에는 '4·3추모 및 범도민 진상규명촉구대회'도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했다. 4·3(1948년 기준) 이후 41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적인 추모행사가 마련된 것이다.

범도민 촉구대회에서는 4·3 관련 정부 보관자료 공개, 연좌제 폐지, 미군정의 4·3 학살 책임 인정, 국회의 4·3 진상조사 등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열망 속에 1989년 5월 문을 연 제주4·3연구소는 4·3피해자 및 유족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이제야 말합니다)를 출간했다.

언론계에서도 활발한 4·3진상규명 취재가 이뤄졌다.

1988년 당시 제주신문은 4·3취재반을 결성, 발굴 취재에 나섰다. 제주신문의 직장 폐쇄 이후에는 1990년 6월 창간한 제민일보가 1999년 8월 28일까지 '4·3은 말한다'를 456회에 걸쳐 장기 연재하며 4·3의 배경, 발발 후, 진행과정에 대해 주민과 정부, 미국·일본 자료를 집중 보도했다.

문민정부 수립 후인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에서 '4·3 특별위원회'를 구성, 피해 신고를 받는 등 공공기관에서 4·3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1999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된 데 이어 보수 진영의 끝없는 공격으로 산통을 겪으면서도 2003년 10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됐다.

2003년 10월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 잘못에 대해 사과하며 도민들을 위로했다.



◇ 4·3의 바른 이름 찾기

4·3 진상조사를 위한 치열한 싸움과 도민적 열망 끝에 4·3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제도가 마련돼 다양한 사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4·3은 이념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사건', '항쟁', '학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에도 일부 보수단체와 인사들은 수차례 소송을 제기하고 이념 공세를 퍼붓고 있다.



4·3 당시 미군정의 역할·책임에 대한 규명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는 브루스 커밍스(75)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지난 6월 제주4·3평화상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4·3 발발 시기는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사실상 통치하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지만, 국제법상 한국 정치에까지 관여할 권리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강호진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장은 "내년 70주년에는 미군정에 대한 책임을 밝혀내고 그 문제를 거론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문제도 해결해야 할 숙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오영훈(제주시을) 의원은 지난 19일 4·3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을 발의, 제출했다.

법률안은 제명을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으로 하고 보상금 지급에 대한 내용을 포함했다.

제14조에 직계나 배우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명시하고, 지급액수와 방법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직계나 배우자가 없을 시에는 민법이 정한 상속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법률안에는 보상금 지급 외에도 4·3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무소로 끌려간 수형 피해자의 명예가 회복되도록 했다.

또 유족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4·3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설치·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오 의원은 "아직도 4·3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정신질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희생자와 유족이 많다"며 "현행 특별법으로는 명예회복과 피해 구제에 미흡해 국민 화합 차원에서 법률안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희생자 신고, 유해발굴 및 유전자 감식을 통한 유가족 찾기 사업 등도 시급하다.

양윤경 제주4·3 유족회장은 "위화감을 조성하려 하거나 정치적 셈법으로 미봉책을 제시하려 하는 꼼수는 버리고 4·3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겨 해결책 마련에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kos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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