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입력 2018-01-11 08:01
[연합이매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한 굽이 돌 때마다 보는 맛 색다른 해안길

(포항=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내가 세상에 태어나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워하는 일일 게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 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여름이면 흰 눈이 그립고 겨울이면 푸른 바다가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립고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 그립다…" - 양광모 시인의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중에서



겨울 바다 하면 동해다. 겨울의 동해는 여름 바다와 달리 날 선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지만 그래도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여름보다 더 색깔이 짙고 푸른 바다, 암초와 해안절벽에 부서지는 흰 포말의 파도를 마주하다 보면 쓸쓸하지만 눈부시기가 이를 데 없다. 텅 빈 마음속으로 낭만과 고독, 위로와 희망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따뜻한 커피와 국물이 그리워진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으로 맑고 투명한 바다를 옆에 두고 기암절벽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힐링 로드로 꼽힌다. 포항시는 해병대 상륙훈련장이 있는 청림 해변에서 호미곶 광장까지 25㎞ 구간을 4개 코스로 나눈 뒤 연오랑세오녀길(청림동∼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6.1㎞), 선바우길(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흥환해수욕장, 6.5㎞), 구룡소길(동해 발산1리∼구만리 어항, 6.5㎞), 호미길(호미곶면 구만리∼호미곶 상생의 손, 5.3㎞) 등 코스별로 특색을 살린 이름을 부여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부턴 구룡포를 거쳐 장기 두원리까지 33.6㎞를 잇는 해파랑길 13ㆍ14코스와 연결되는데, 이 구간을 해안둘레길에 포함해 해파랑길(5코스)로 부르기도 한다.

정동재 포항시 국제협력관광과 관광개발팀장은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해안 몽돌과 백사장, 항구와 포구, 군 초소 이동로 등을 그대로 활용했고 덱 로드는 절벽 등 단절된 구간에만 설치해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며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선바우, 하선대, 모감주나무 군락지, 구룡소, 독수리바위 등 역사와 전설이 서린 명소를 거쳐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정 팀장과 함께 용 아홉 마리가 승천했다는 구룡소, 일몰이 아름다운 독수리바위, 매년 12월 31일부터 새해 아침까지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이 열리는 호미곶 해맞이광장의 상생의 손 등을 감상할 수 있는 3코스와 4코스를 걸어봤다. 겨울 바다의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구간은 총 11.8㎞에 달하며, 소요시간은 3∼4시간이다.



◇ 가슴이 뻥 뚫리는 겨울 바다 풍경

바람과 파도를 따라가는 해안둘레길의 제3코스 시발점을 흥환해수욕장 건너 동해초등학교 흥환분교(폐교)로 삼았다. 자동차를 주차하고 흥환교를 건너 흥환1리 방파제로 이동했다. 통발 그물이 쌓여 있는 작은 포구에는 바닷바람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든다. 스마트폰을 보니 영하 6도, 체감온도 영하 11.7도라고 뜬다. 한파를 몰고 온 동장군의 입김으로 인적이 없는 포구는 쓸쓸하지만 운치가 있고, 차디찬 바람과 거친 파도는 청량감마저 느끼게 한다.

영일만을 왼편에 두고 해안길을 따라가면 옛날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 구간에 돌울타리를 쌓고 군마 등을 키우고 관장했다는 장기 목장성비(牧場城碑)가 있다. 비각 안에는 장기 목장성비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공덕비, 목장을 관장하던 감목관(監牧官) 공덕비 등이 함께 세워져 있다.

비각을 지나면 해안절벽 비탈면 위에 해국(海菊) 군락지가 자리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꽃말처럼 해국은 모진 비바람과 바닷바람을 견디며 가을에 보라색 꽃을 피운다. 해국이 활짝 핀 해안둘레길의 가을을 떠올리며 해안길 따라 걸었다. 기암 아래 얕은 해변길을 걷는데 돌로 포장되어 있어 걷기에 좋다. 혹한으로 빙판이 된 돌길과 걷기가 다소 불편했던 자갈길을 지나면 투구를 쓴 장군이 아이를 업고 영일만으로 걸어가는 독특한 모양의 장군바위를 만난다.



장군바위에서 몇 걸음 옮기면 '천연기념물 제371호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군락지' 안내판이 나타나고, 그 뒤로 봄이 되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골짜기에 꽃이 만발한다는 발산(發山) 2리 포구가 보인다. 모감주나무 3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발산2리는 여사(余士)라 불린다. 신라가 망한 후 한을 품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는데, 모두 선비 행세를 하며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과 매서운 겨울 해풍에 말리는 과메기가 겨울 포구의 정취를 자아낸다.

발산 2리에서 대동배리까지의 해안에는 지층 단면을 드러낸 바위 절벽 아래 파도와 해풍에 깎인 갯바위와 자갈이 펼쳐져 있다. 파도에 휩쓸린 몽돌이 화음을 만들고,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갈길을 걷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난 뒤 짧은 숲길을 거쳐 해변으로 다시 내려서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파도의 흰 거품과 주변의 풍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되는 코스다.

해안초소를 지나 숲으로 덮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400m 숲길을 빠져나가면 바닷가에 솟아 있는 동을배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벼랑 아래는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구룡소(九龍沼)가 있다. 구룡소는 높이 40∼50m, 둘레 100여m의 움푹 팬 기암절벽이다.



영일군사(郡史)에 따르면 '기암절벽에는 용이 승천할 때 뚫린 9개의 굴이 있는데, 파도칠 때 그 굴로 유입된 바닷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용이 불을 뿜어내는 것 같고, 그 소리가 천지를 울리듯 우렁차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느낌은 탐방객 각자의 몫이다. 전망대에 서면 크고 작은 파도가 들고나면서 용이 살았다는 소를 휘감고, 푸른 하늘빛이 더해져 구룡소 풍광에 생동감이 넘친다.

구룡소에서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대동배 1리다. 마을의 형상이 먼바다에서 보면 마치 날아가는 학의 모습이라 학달비(鶴達飛)라 불린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 대동배 교회 앞에서 길이 갈라진다. 직진하면 대동배 2리까지 도로 길을 걷게 되고, 교회 뒤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지방도로의 위험요소를 피해 조성된 숲길 구간으로 1.2㎞ 내내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소나무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파도 소리가 귓전을 울려 지루할 틈이 없다.

바닷가보다 포근한 숲길을 벗어나 지방도로 건너 대동배 2리에 들어선다. 한적한 마을길 중간지점에 있는 나무 데크를 통해 바닷가로 내려선다. 절벽과 파도 탓에 접근이 불가능했던 구간으로 암벽 앞 얕은 바다 위에 목재 데크를 깔아 해안둘레길을 조성했다.



길 왼쪽으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푸른 동해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기암절벽이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추위 탓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덱 길은 두 명이 교차해 걸을 수 있을 만큼 폭이 여유롭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보는 맛이 색다른 해안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거친 파도가 포철의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고, 암초에 부서지는 흰 포말의 파도를 쳐다보면 볼수록 빨려든다. 마음속 잡념이 씻어 내려가는 듯하고 눈은 더욱 맑아진다.

덱 길이 잠시 끊기고 자갈길이 이어진다. 다시 덱 길을 따라가면 자연이 빚어낸 조각품인 모아이 바위와 마주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이스터 섬의 모아이상을 닮았고, 그 앞바다는 겨울이어서 그런지 더 투명하고 맑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옷 속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이 어느새 저만치 비켜선다.



◇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조각된 바위

거듭거듭 돌아보게 되는 해안둘레길이 이어지다 지방도로와 마주친다. 도로변에는 월보 서상만 시비 '나 죽어서'가 서 있고, 멀리 호미곶 주변 건물들이 보인다. 시비를 지나면 바로 대보면 구만리(九萬里)다. 이곳에서 동해를 빨갛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인 호미곶까지는 포장도로지만 차량 통행이 거의 없고, 동해안 국토종주자전거 길과 일치한다.

구만리라는 지명은 1453년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한 영의정 황보인의 노비가 황보인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에서 구만리나 떨어진 호미곶으로 피신한 데서 유래했다. 후손들은 가문을 잇게 해준 노비 단량을 기리는 비석을 구룡포 광남서원에 세웠다.

한낮이어서 그런지 바람의 세기가 약해졌다. 정 팀장은 "까꾸리개로 불리는 이곳은 포항 일대에서 가장 바람과 파도가 거친 곳으로 풍파가 심하면 청어떼가 갯바위까지 떠밀려와 까꾸리(갈고리)로 쓸어 담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구만리 어촌길을 걷다 보면 거친 파도로 악명 높은 교석초에 홀로 서 있는 녹색의 등표(燈標)가 눈에 들어온다.

1907년 이곳을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주변을 조사하던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이 높은 파도에 휘말려 좌초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한 사고 이후 등표가 세워졌다고 한다. 해안가의 실습선 조난기념비는 1926년 세워진 뒤 해방 후 훼손됐다가 1971년 재일교포가 다시 세운 것이다.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모양의 기묘한 바위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자세히 보면 날개를 접고 앉은 독수리 형상으로 언젠가 푸른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듯하다 해 질 녘 독수리 부리에 걸리는 낙조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바닷물 위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갯바위는 온통 갈매기들 차지다.

겹겹이 몰려오는 파도를 뒤로하고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쬐는 갈매기들로 휑한 겨울 해변이 조금은 덜 쓸쓸해 보인다. 거센 파도의 포말 위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갈매기떼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 발걸음을 재촉하니 돌문어잡이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 대포항이다. 대포항 등대로 가는 방파제에 그려진 트릭벽화는 비바람에 색이 바래긴 했지만 추억으로 남기기 위한 포토존으로 그만이다. 상생의 손을 주제로 한 트릭아트는 그 길이가 160m에 이른다.

대포항에서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와 호미곶 등대를 지나면 해안둘레길 4코스 종착지인 호미곶의 '상생의 손'이 반긴다.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상생의 손'은 간혹 갈매기들이 조각작품의 손끝에 앉아 일출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새해에는 왠지 일출과 일몰 그리고 겨울 바다가 그리워진다. 이때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제격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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