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채점하는 체조 연기…'양태영 오심 이젠 없다'

입력 2017-12-18 06:00
인공지능이 채점하는 체조 연기…'양태영 오심 이젠 없다'

국제체조연맹, 후지쓰와 2020년 도쿄올림픽서 'AI 심판 지원시스템' 도입

3차원 레이저 센서 탑재한 로봇이 선수 동작·연기 평가…채점 시간 단축

알고리즘에 따른 채점으로 공정한 점수 기대감 vs 해킹 위협 불안감 교차



(서울=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 지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 기계체조의 간판 양태영(당시 24)은 남자 개인종합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금메달을 미국의 폴 햄에게 억울하게 빼앗기고 동메달에 머물렀다.

심판이 평행봉에서 양태영의 스타트 점수를 10점이 아닌 9.9점으로 잘못 채점한 바람에 양태영은 큰 손해를 봤고, 그 사이 햄이 철봉에서 전세를 뒤집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명암이 갈리는 체조의 특성상 0.1점을 깎아내린 심판진의 결정적인 오심은 한국 체조에 두고두고 한(恨)으로 남았다.

앞으로는 이런 오심이 체조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총아로 떠오른 인공지능(AI)이 체조 채점에 등장할 예정이어서다.

다양한 구기 종목에서 도입한 비디오 판독, 테니스의 호크 아이는 심판의 판정 후 영상과 그래픽으로 오심을 바로 잡을 보조 기재라면 체조의 AI 채점은 AI가 실제 점수를 준다는 측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체조는 사람(심판)이 사람(선수)의 연기를 점수로 평가하는 대표 종목이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루마니아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에게 체조 역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의 퍼펙트 점수를 준 것도 인간이었고, 양태영의 연기를 오판한 것도 인간이었다.

기록이 아닌 인간의 몸이 빚어내는 예술성을 평가하는 종목 특성상 채점에 인간(심판)의 불완전성이 내포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불완정성과 불공정성을 줄이고자 국제체조연맹(FIG)은 일본 정보기술(IT) 기업 후지쓰와 손잡고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AI 로봇이 심판의 채점을 돕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AI가 인류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줄지 아니면 피폐하게 만들지 한창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상황이라 체조의 AI 기술 도입은 더욱 주목을 받는다.

◇ 일본인 FIG 회장, AI 채점 도입 강력한 의지 = 일본체조협회 전무 출신으로 제9대 FIG 회장으로 뽑혀 올해 1월 임기를 시작한 와타나베 모리나리 회장은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체조 채점 때 심판을 돕는 AI 지원시스템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 중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도쿄올림픽이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로봇을 중심으로 한 혁신 경제의 장(場)이 될 것으로 지난달 전망하고 일본인 회장이 이끄는 FIG도 이런 추세에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후지쓰는 종목마다 10대 이상의 동작측정 카메라를 동원해 체조 선수들의 연기를 3차원(D) 입체 영상으로 담는 초정밀·고선명 레이저 센서를 탑재한 로봇을 개발 중이다.

FIG는 지난 10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전 세계 관계자들에게 시스템 시연을 했다.

이어 내년 세계주니어대회에서 적용률을 50%로 끌어올리고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치러지는 시니어 세계선수권대회 때 정식으로 테스트할 예정이다.

◇ AI 로봇, 알고리즘으로 기술·실시 점수 축적 = AI 로봇은 전 세계 체조 선수들이 펼치는 수도 없이 많은 동작을 영상으로 축적해 알고리즘을 거쳐 점수를 정형화한다.

한충식 대한체조협회 전무이사는 18일 "기술(난도) 점수뿐만 아니라 실시(연기) 점수도 AI가 채점할 수 있도록 로봇을 개발한다는 게 FIG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기계체조 점수는 기술 점수와 실시 점수의 총합으로 이뤄진다. 난도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지만, 선수마다 독특한 개성이 표출되는 실시 점수마저 AI가 계량화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한 전무에 따르면, FIG의 이런 추세에 맞춰 프랑스 기계체조 선수 출신 한 인사는 남자 개인종합 6개 종목의 난도 연기를 세분화하고 동, 서, 남, 북, 위, 아래 등 6개 방면에서 연기 동작을 살필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선수와 지도자들의 훈련을 돕는다.

한 전무는 "똑같은 난도의 기술이라도 심판마다 조금씩 채점을 다르게 할 수 있다"면서 "AI가 채점에 도입되면 이런 실수를 크게 줄여 정확한 점수를 산출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오심이라는 체조의 원초적인 문제를 AI가 해결하고 이에 따라 부정 판정 논란도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다.

경기에서 하루 8시간 채점해야 하는 심판이 집중력 문제로 동작마다 일관성 있는 점수를 내리긴 어려운 실정상 컴퓨터가 인간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체조 경기에선 심판진이 선수마다 기술 점수와 실시 점수를 일일이 매긴 뒤 이를 모아 총점을 내린다. AI 로봇이 심판 보조로 투입되면 채점 시간을 줄여줘 선수와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 인간의 창의성은 어디로…사이버 보안에 취약할 수도 = 코마네치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독창성을 거론하며 "전혀 못 보거나 AI 알고리즘에 등록되지 않은 동작을 선수가 했을 때 어떻게 점수를 줄 것이냐"며 AI에 의구심을 보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AI 채점 시스템을 올림픽과 같은 큰 대회에 섣불리 도입했다가 해커들의 공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많은 동작을 점수로 체계화한 AI 알고리즘 자체가 조작되면 모든 점수가 뒤죽박죽될 개연성도 크다. 해커들이 점수를 뒤흔들어 체조의 신뢰도를 급격하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AI 채점 보조시스템과 관련한 사이버 보안 문제는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당장 AI가 체조 심판을 대체할 순 없지만, 언젠가 그들의 직업을 빼앗을 때 심판들이 느낄 인간 소외와 코마네치의 지적처럼 체조 선수들의 창의성 저하도 아울러 거론되는 문제다.

AI 열풍은 절제된 동작과 아름다운 신체의 조화를 최고 가치로 삼는 체조에도 마침내 불어닥쳤다.

cany99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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