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붙인 '야만인' 꼬리표에 '식인주의'로 맞선 라틴아메리카

입력 2017-12-14 10:27
수정 2017-12-14 10:37
유럽이 붙인 '야만인' 꼬리표에 '식인주의'로 맞선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식인주의' 다룬 책 '즐거운 식인'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아메리카를 발견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면서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낙인찍었다. 초기 정복자들은 소문을 바탕으로 원주민들의 식인풍습을 기정사실로 하고 전파했다. 사람을 먹는 야만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착취와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유럽인들의 행태에 대해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은 식인주의(cannibalism)로 대응했다. 식인 풍습이 실제 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지 세계의 좋은 것을 왕성하게 먹어치우고 흡수해 독특하고 다원화된 문화를 이루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것이다.

스페인 현대문학과 영화 등을 연구하는 임호준 씨가 쓴 '즐거운 식인'(민음사) 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식인주의'에 주목한다.

진지하고 근엄하고 권위적인 것을 비웃는 라틴아메리카의 카니발(canibal. 축제)적 전통에서 보면 서양 학자들 사이의 식인 논쟁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며 서구에서 갖다 붙인 야만인 신화를 라틴아메리카가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식인주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식인주의에서는 아무것이나 먹지 않고 맛있고 좋은 것들만 먹는다. 이런 점에서 발달한 기계문명, 세련된 문화를 가진 유럽인들은 '맛있는 먹잇감'이다. 유럽의 문물에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문물을 능동적으로 골라 먹는 것이다.

동시에 먹어서 영양분은 흡수하되 필요 없는 것은 배설하기도 한다. 식인주의는 유럽의 좋은 점은 흡수하지만, 기독교의 위선, 과도한 형식주의는 거부하거나 배설함을 선언한다. 이렇게 식인주의는 브라질의 문화 정체성 형성에 핵심이 됐다.

책은 영화와 문학, 미술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야만인 담론의 역사를 살피고 이후 식인주의가 나오게 된 맥락을 설명한다.

식인주의 운동의 강령을 담은 '식인선언문', 식인주의의 상징적 작품인 마리우 지 안드라지의 소설 '마쿠나이마'를 소개하고 식인주의 운동과 함께 시작된 브라질의 민중음악 전통을 삼바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식인주의는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화에도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 책은 식인주의를 계승해 1960년대 말부터 브라질 음악을 중심으로 벌어진 '열대주의' 문화운동, 브라질의 신영화 운동인 '시네마 노부', 식인주의가 현대 문학에 끼친 영향까지 두루 짚는다.

저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식인주의를 표방한 작품들이 나오고 카니발리즘과 관련된 문화적 담론에서 식인주의가 논의되는 것을 보면 식인주의는 브라질 문화,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나 담론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272쪽. 2만2천원.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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