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그사건 이후] ② 콜 못채워 삶도 못채운 실습여고생

입력 2017-12-16 07:01
수정 2017-12-16 09:05
[2017년 그사건 이후] ② 콜 못채워 삶도 못채운 실습여고생

"오늘도 퇴근 늦을 것 같아" 홍수현양, 실습 124일째 외롭고 슬픈 선택

사건 후 부당노동행위 드러나…제주서는 안전 미흡으로 실습생 사망

정부, 조기취업 형태 현장실습 폐지…"학생들 사회서 보호받아야"



(전주=연합뉴스) 임채두 기자 = 눈물이 강을 이뤘다. 부모는 꽃 피우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뜬 자식을 끌어안고 말을 잇지 못했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은 여고생도 부모 품에 안겨 말이 없었다.

전북 한 특성화고 고교생이었던 고 홍수현(19)양은 LG유플러스 전주고객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지 124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지난 1월 23일 홍양이 발견된 곳은 전주시 덕진구 한 저수지였다.

소지품에서 학생 신분증이 발견되면서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학생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한 시민사회단체가 '현장실습장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린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건은 시신과 함께 수면 위로 올랐다.

홍양은 지난해 9월 8일부터 '취업 연계형 현장실습' 차원에서 해당 고객센터에 근무했다.

변심한 고객의 마음을 돌리는 해지 방어부서 일명 'SAVE팀' 업무는 사내에서도 업무 강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첫 달에 80만원, 둘째 달에 120만원가량을 받았다. 오후 6시를 넘겨 야근하는 날도 잦았다.

현장실습 표준협약서에 명시된 금액과 정해진 근로시간을 무시한 전횡에 가까웠다.

'아빠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 퇴근 늦을 것 같아'라는 홍양 문자메시지가 부모에게 수시로 전달된 이유다.

하지만 사측은 '홍양 죽음과 노동환경은 무관하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판단한다'며 발을 뺐다.



전북 지역 29개 시민사회단체가 진상조사에 나서고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에 착수하면서 홍양을 옥좼던 수많은 위법행위가 드러났다.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은 근무 기간에 홍양이 오후 6시를 넘겨 퇴근한 날을 일일이 조사했다.

콜센터 녹취록에 홍양의 초과근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으나 고객센터 측은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홍양뿐 아니라 정당한 근로 대가를 받지 못한 사람은 2014년부터 3년 동안 전체 노동자 670여명 중 80%에 달했다.

홍양 계약서에 근무일별 노동시간과 휴게시간을 기재하지 않은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매일같이 고객 폭언에 시달리던 학생 노동자는 사내에서도 노동력 착취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전주지청은 전주고객센터에 즉시 과태료를 부과하고 초과근무수당 미지급 사안은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넘겼다.



현장실습 학생들이 현장에서 겪는 수모는 비단 이번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홍양과 같은 나이인 고 이민호군도 지난달 9일 제주시 구좌읍 한 공장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제품 적재기에 목 부위가 끼이는 사고로 크게 다쳐 치료를 받다가 열흘 만에 숨졌다.

사고 발생 위험이 큰 설비에 접근을 막는 안전시설이 부족했고 안전 교육이 미비한 점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업체는 현장실습생들에게 하루 12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을 시키고 현장실습표준협약서상의 실습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는 등의 의혹을 받고 있다.

어른들이 헐겁게 쳐놓은 사회안전망 탓에 어린 학생은 현장실습 내내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 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들불처럼 일어나 사고 업체를 고소·고발하고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과 불매운동을 벌였다.



불과 1년 사이 현장실습 고교생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정부는 조기취업 형태의 실습을 내년부터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노동 중심에서 학습 중심으로 현장실습 변경, 6개월에서 최장 3개월로 기간 단축, 현장실습 사업장 전수 점검, 위반사항 적발 시 학생 복교 조치 등이 개선안의 골자다.

'현장실습 상담센터'(가칭) 설치·운영과 취업률 중심의 학교평가, 예산지원 체제 개선 등도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정부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현장실습 사업장에서 학생 보호가 성인 이상 수준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설동훈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현장실습현장에서 학생들은 일반 근로자로 대우받지 못하면서 기술교육조차 제대로 학습할 수 없다"며 "이제라도 근로감독을 철저히 하고 현장실습을 학습 중심으로 바꿔놓겠다는 정부 조치는 합당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제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학생들을 보호할 장치가 더 촘촘하게 마련돼야 한다"며 "사회에 이제 첫발을 디딘 학생 노동자는 성인 노동자인 만큼 과잉에 가까운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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