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열 달 지났어도 소 울음 환청"…구제역 트라우마로 '고통'

입력 2017-12-17 08:11
수정 2017-12-17 09:07
[르포] "열 달 지났어도 소 울음 환청"…구제역 트라우마로 '고통'

지난 2월 소 953마리 살처분한 보은 축산농가 자금난·후유증 심각

"가엾은 생명 떠나보냈어" 죄책감 시달려…10개월째 송아지 못 들여

(보은=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충북 보은군 탄부면 이모(50)씨는 요즘도 축사 앞 논바닥에 불룩 솟아있는 소 무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아니, 그곳을 지나칠 때면 애써 먼 산을 쳐다보며 외면한다.



검은 비닐이 씌워져 있는 그 무덤에는 그가 자식같이 키우던 한우 378마리가 묻혀 있다. 열 달 전 구제역이 농장을 덮치면서 하룻밤 새 무덤이 만들어졌다.

당시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살처분 현장을 지켰다. 죽음을 직감한 듯 겁먹은 표정으로 커다란 눈망울을 멀뚱거리던 소들의 가엾은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자식같은 소 묻고, 이웃에도 얼굴 못 들어

그의 농장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지난 2월 9일. 옆 마을 젖소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나흘 만이다.

바이러스 침투에 대비해 농장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던 그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소에게 사료를 주다가 이상증세를 보이는 소 1마리를 발견했다. 새끼 밴 암소였는데, 사료를 거부하는가 싶더니 구석으로 물러서서 침까지 흘렸다.

불길한 기운에 부랴부랴 방역 당국에 신고했고, 곧바로 키드검사와 정밀검사가 진행됐다. 그러고는 몇 시간 만에 청천벽력 같은 구제역 판정이 났다.

흰색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 바깥으로 통하는 모든 통행로를 폐쇄하면서 농장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난장판이 됐다. 감염 소를 포함해 같은 케이지에 있던 7마리가 1차로 살처분됐다.

그의 농장 옆에는 부모 명의로 된 한우농장 2곳이 더 있다. 반경 150m 안에 다닥다닥 붙은 데다, 인부들도 수시로 들락거려 한 농장이나 다름없다. 당국은 항체 형성률 검사를 3곳 모두로 확대했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자 전량 살처분 결정을 했다.

구제역 판정이 난 지 이틀 만에 378마리가 떼죽음 된 것이다.



생떼 같은 소를 몽땅 땅에 묻은 뒤에도 그는 한동안 농장 안에 갇혀 지냈다. 방역 매뉴얼이 농장 밖 출입을 금한 탓도 있지만, 몹쓸 병을 옮겨왔다는 죄책감에 이웃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다.

이씨는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이었고, 밤이 되면 텅 빈 축사에서 송아지 울음 환청이 들려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고 끔찍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 불과 9일 만에 탄부·마로면 축산업계 초토화

보은에서 구제역이 발생하지 벌써 10개월을 넘어섰다. 지난 2월 5일 발생한 이곳 구제역은 불과 9일 만에 탄부·마로면의 한우·젖소농장 7곳을 초토화시키면서 지역사회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예방 차원의 살처분을 포함해 소 953마리가 매몰됐고, 한 달 넘게 가축 이동이 제한돼 축산기반 자체가 무너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입구를 가로막았던 통제초소와 뿌연 소독약을 내뿜던 방역시설 등은 사라졌다. 소들의 구슬픈 울음과 중장비의 매몰작업 소리로 시끄럽던 농장도 다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농민들은 여전히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생업을 못 해 자금압박을 심하게 받는 데다, 가엾은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다.

구제역이 발생한 농장은 3차례 바이러스 검사를 통과해야 다시 송아지를 들일 수 있다. 이씨도 석 달 넘는 공백기를 거쳐 지난 6월부터 서서히 송아지를 들이고 있다.

그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소값의 80%)과 은행 빚을 합쳐 지금까지 280마리의 송아지를 들였다"며 "삭막했던 축사에 다시 송아지 온기가 채워지는 것은 반갑지만, 열 달 전 악몽이 불쑥불쑥 떠올라 좀처럼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인근에서 한우 300마리를 사육하는 서모(53)씨는 구제역을 겪은 뒤 방역시설을 대폭 보강했다. 소독약 분무장치를 고성능으로 바꾸고, 차량용 방역설비도 새로 갖췄다.

그 역시 지난 2월 한우 4마리를 농장 앞 공터에 묻었다. 그는 "4마리를 잃는 선에서 마무리된 게 천만다행이지만, 그때부터 방역에 신경 쓰느라 이웃과 왕래조차 끊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 소 값 80% 보상…자금난에 송아지 들이지 못해

아직까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농가도 있다.

보은군 조사 결과 소를 살처분 농가 11곳 중 2곳은 아직 송아지를 들이지 못했다. 정부 보상이 충분치 못한 데다, 봄부터 송아지 값이 오르면서 자금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보은축협 지현구 상무는 "입식 자금도 문제지만, 비육우의 경우 생후 30개월 이후 출하되는 점을 감안하면 2년 치 경영자금을 확보해야 송아지를 들일 수 있다"며 "구제역을 겪은 농장이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4∼5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제역 재발을 막기 위한 당국의 대응 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보은군은 지난 2월과 6월, 11월 3차례에 걸쳐 관내 농장 753곳에서 사육되는 모든 한육우와 젖소 2만2천500여마리 대해 백신접종을 마무리했다.

모든 농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접종이 이뤄졌고, 부실접종이나 누락을 막기 위해 농장마다 공무원이 배치돼 접종장면을 일일이 사진 촬영했다.

그 결과 이 지역 소의 항체 형성률은 100%를 기록했다. 통상 80% 이상 항체가 형성되면 구제역 발생위험이 현격히 낮아지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신중수 보은군 가축방역계장은 "두 번 다시 구제역 바이러스가 들어올 수 없도록 관내 모든 소를 추적 관리하고, 관내에 드나드는 모든 축산차량에 대한 소독을 의무화하는 등 철통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bgi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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