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 프로그램, 비범한 연주"…게르기예프-마린스키의 마법

입력 2017-12-13 11:44
"전형적 프로그램, 비범한 연주"…게르기예프-마린스키의 마법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잘 알려진 차이콥스키의 교향곡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이 새롭게 들려온,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러시아 음악의 대가 게르기예프와 마추예프, 그리고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였기에 해낼 수 있는 연주였다.

지난 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그리고 협연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는 러시아인의 정열적인 기질을 마음껏 담아낸 힘차고 열정적인 연주로 한국 음악팬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사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에 대해 일부 클래식 마니아들 사이에선 다소 불만도 있었다. 러시아 음악 연주의 대가인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좀 더 다채롭고 현란한 20세기 러시아 음악을 연주해 주기를 기대했던 음악애호가들은 지나칠 정도로 유명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된다는 소식에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연주에 이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마추예프의 협연으로 연주되자 음악회가 다소 진부해질 것이라는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다. 비록 프로그램은 전형적이었으나 연주 자체는 비범했다.

무시무시한 힘과 강철 같은 음색으로 유명한 마추예프는 몇 차례 내한공연을 통해 피아노 협주곡 몇 곡을 한 무대에 연주해내며 '괴력'을 과시한 바 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한 곡만을 연주했지만, 특유의 힘과 직설적인 표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무대를 압도했다.

마치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오듯 시작되는 1악장 도입부에 이어 오케스트라가 서정적인 주제를 연주하는 그 순간부터 마추예프가 두드리는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의 소리가 또렷하게 전달되며 경탄을 자아냈다. 대개의 피아니스트가 흘러가듯 무심하게 처리하는 저음부의 음표들도 또렷하게 들려왔고, 빠른 템포의 3악장에서 한꺼번에 여러 음을 빠르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조차 힘이 달리는 느낌은 없었다.



대체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감상적'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마추예프는 그런 통념을 깨고 빠르게 질주하는 템포로 강한 활력을 발산했고, 이는 느린 2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악장 악보에 쓰여 있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 심오한 느린 템포로 음 하나하나를 충실히 연주)라는 지시도 마추예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다지 심오하지 않은 편안한 느낌으로 2악장 전반부를 이끌어갔고, 피아노 선율과 어우러진 목관악기의 선율도 감상적이기보다는 단순명료하게 들려왔는데, 오히려 이런 연주가 참신한 느낌을 줬다.

무엇보다 마추예프의 개성은 3악장 종결부에서 터져 나온 폭풍 같은 연주로 마음껏 드러났다. 앙코르로 선보인 그리그의 '페르귄트' 중 '산신의 전당'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연주는 음악애호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전해줬다.

휴식 후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 역시 매우 자주 연주되는 유명 레퍼토리지만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특별했다.

지휘대 없이 단원들과 똑같은 평지에서 자유분방한 지휘를 펼쳐 보인 게르기예프는 오케스트라와 한몸처럼 움직였다. 게르기예프의 지휘는 때때로 무리할 정도로 템포 변화가 많았음에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그의 지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대개 이 곡을 연주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도입부의 클라리넷이 제시하는 '운명'의 동기에 무게 중심을 두고, 마지막 악장에서 '운명'의 동기가 벅찬 '승리'의 음악으로 바뀌는 순간을 강조한 목표지향적인 연주로 극적인 힘을 끌어낸다.

반면, 게르기예프는 '운명'의 동기가 '승리'로 향해가는 여정 자체도 즐기는 듯했다. 그는 1악장의 제2주제를 연주할 시점에서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이 바뀌듯 급격히 템포를 늦춰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가 하면 왈츠풍의 3악장 중간 부분은 다채로운 음색을 강조하며 템포를 몰아치며 긴장감을 연출했다.

본 공연에서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도 훌륭했지만, 앙코르로 연주한 바그너의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의 빼어난 연주는 두고두고 음악애호가들의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길 것 같다.



herena88@naver.com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