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대신 개조한 네덜란드 벌집APT, 한국에 본보기 될수도"
암스테르담 교외의 철거 위기 아파트 '살려낸' 건축가 잔더르 인터뷰
"합리적 가격에 집 장만·DIY 개조 가능"…올해 EU 현대건축상 수상
(암스테르담=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네덜란드 스히폴 국제공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30분을 달리면 암스테르담 남동부의 더 플랏 클레이뷔르흐에 닿는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봄 직한 평범한 11층짜리 아파트 단지다. 지난 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정부 인사들과 함께 찾은 아파트 통창 안으로는 아늑한 조명 아래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거나 화분을 정리하는 사람들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수년 전의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놀랐을 풍경이다. "건물은 비어 있었고 분위기는 우울했고 동네가 청결하지도 않았어요. '데드존'(dead zone) 같던 곳이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했죠." 아파트를 둘러보던 건축가 잔더르 페르묄런 빈드산트의 이야기다.
클레이뷔르흐는 네덜란드에 도시개발 붐이 일었던 1970년대 초 이 지역에 들어선 벌집 구조의 대형 주거단지 중 하나였다. 1992년 10월 바로 이웃한 단지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가 지역 전체의 쇠락을 이끌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했던 이 참사로 아파트는 불탔으며 40여 명이 희생됐다(비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사람들까지 더하면 인명 피해는 더 클 것이라는 게 잔더르 설명이다).
비극을 겪은 단지는 철거됐다. 주민은 하나둘 떠났다. 늘어난 빈집은 범죄를 불렀다. 약물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보였다.
벌집 아파트가 하나둘 사라지면서 클레이뷔르흐 정도만이 남았다. 그 역시도 철거될 운명이었던 클레이뷔르흐를 온기 가득한 아파트로 '살려낸' 이들이 바로 잔더르를 비롯해 네 사람이었다.
클레이뷔르흐는 준공공기관인 사회주택공사 손에 먼저 넘어갔다. 재개발을 생각했던 공사는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오자 철거를 서둘렀다. 당시 추정한 철거 비용은 7천만 유로(현재 환율 기준 899억원). 벌집 아파트를 살리자는 의견이 이어지자 세 디자이너는 건물을 개조하기로 하고 '1유로'에 버려진 아파트를 사들였다.
"물론 사람들을 다시 데려오기가 쉽지 않았죠. 버려진 아파트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일이 어려웠어요."
새로운 주인들은 '더 플랏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2가지를 홍보하는 데 주력했다. 지하철 10여 분 떨어진 암스테르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움 저렴한 가격인 1억 원에 집을 살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 입주자 스스로 마음대로 집을 개조할 수 있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이들이 직접 손을 댄 부분은 기본적인 구조 정도였다. 너덜너덜해진 페인트를 벗겨낸 뒤 노출 콘크리트로 외관을 마무리했고, 엘리베이터 복도의 벽을 철거하고 유리창을 설치해 외부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공동체의 탄생'이다. 다양한 행사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해 나쁜 이미지를 희석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함께 채소밭을 가꾸고 맥주를 빚는 일이 이뤄졌다. 서로 모르던 사람들은 DIY 과정에서 정보와 비법을 나눴고 끈끈해졌다. 502가구를 4차례에 걸쳐 분양, 먼저 입주한 사람들을 보고 아파트 구매를 결정하도록 한 것도 유효했다. 모든 아파트가 완판됐고 모두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집들이 탄생했다.
잔더르는 보람찬 얼굴로 "이미 건설 기간에 공동체가 조성됐다. 새로운 이주자들과 새로운 개념의 사회적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이 이제 우리에게 '왜 다른 아파트들은 철거됐느냐'고 묻죠. 한국에도 철거를 앞둔 재건축 아파트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클레이뷔르흐의 성공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클레이뷔르흐 사례를 일반화하는 건 조심스럽다. 잔더르는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가구 수를 크게 불리고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한국 방식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버려진 아파트라도 단 1유로에 살 수 있었던 것도 금융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주목한다면 1960~1970년대 건설된 노후 건물로 고민하는 세계 각국이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EU 현대건축상 심사단이 만장일치로 내린 평가가 이를 압축적으로 말해준다. "더플랏 클레이뷔르흐는 공동체 건물에 미래가 있다는 점을 명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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