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국제이슈] ⑤거세진 보호무역 파고…자유무역의 미래는
트럼프 취임하자마자 다자무역협정 제동…관세폭탄·세이프가드 파상공세
中 맞불 놓으며 G2 갈등…'보호무역 배격' 구호 실종에 WTO회의도 '빈손'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은 자유무역규범이 지배하던 세계통상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대선 기간 때부터 자유무역에 회의적이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NAFTA) 재협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밀어붙이며 보호무역 의지를 행동으로 옮겼다.
아울러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내는 중국과 한국 등을 불공정 무역국으로 몰아붙였다.
트럼프의 등장은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촉발된 반(反)세계화와 경제 국수주의를 더욱 심화시켰고, 이런 추세는 전 세계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특히 자유무역 수호자를 자임했던 미국의 공백은 글로벌 무역질서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 나프타·TPP 철퇴로 본격화한 트럼프發 보호무역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미국을 떠난 공장과 일자리를 되찾아오겠다며 미국 중심의 무역질서를 공언했다.
그의 의지는 취임 직후부터 자유무역체제 흔들기로 구체화했다.
1월 22일 백악관 참모진 시무식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 블록 가운데 하나인 나프타의 재협상을 천명했다. 이튿날에는 "미국 근로자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이라며 TPP 탈퇴 계획에 서명했다. TPP는 세계최대 다자 무역협정을 지향하며 직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최대 통상업적 중 하나다.
나프타와 TPP의 균열은 그 자체만으로 국제무역질서에 큰 충격을 안겼다.
트럼프는 미국의 무역정책을 담당하는 주요 보직도 보호주의 성향이 강한 인사로 채우며 행보를 본격화했다.
트럼프 대선캠프에서 FTA에 대한 비판적 정책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던 윌버 로스가 대표적 예로,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상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밖에도 대표적 반중(反中) 학자이자 초강경 보호무역주의자인 피터 나바로가 백악관 무역위원회 위원장에, 미국 철강업체들의 대(對)중국 반덤핑 제소를 이끌었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임명돼 트럼프 보호무역정책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무기력했다.
지난 3월 열린 주요 20개국(G20) 회의 공동선언문에서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한다"는 말이 처음으로 빠진 것과 이어 열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연례회의에서도 보호무역 대응 논의가 실종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마쓰다와 함께 16억 달러를 들여 미국 남부에 새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고 대만의 폭스콘(훙하이정밀)은 위스콘신 주에 최대 100억 달러를 투자해 LCD 공장을 짓는다고 발표했다. 한국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미국에 가전과 세탁기 공장을 추진 중이며, 현대차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전에 자율주행 기술 분야 등에서 오는 2021년까지 5년간 미국에 총 3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 관세폭탄 치고받는 무역대국들…자유무역 미래에 먹구름
미국에서 시작한 보호주의 바람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흐름이다.
통계로 봐도 확연하다. 세계무역기구 집계를 보면 올해 상반기 G20 국가의 반덤핑조사 개시 건수는 총 123건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108건)보다 24% 늘어난 규모이며 반기 기준으로 2013년 하반기(144건) 이후 가장 많았다.
이 가운데 미국의 반덤핑조사 개시 건수는 42% 늘어난 34건으로, 증가세를 주도했다.
미국의 칼끝은 중국을 향하곤 했다. 중국이 환율조작과 덤핑 등 불공정한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무역흑자를 축적했다며, 반덤핑조사 같은 무역구제제도까지 동원해 '중국 때리기'에 나선 것이다.
지난 8월 미국 USTR이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 기술이전 요구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외국들에 의한 지식재산권 탈취로 미국이 매년 수백만 개의 일자리와 수십억 달러를 잃게 됐다"며 조사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미국은 태양광 패널과 스테인리스강 플랜지 등 중국산 제품에 대해 잇따라 반덤핑·상계관세 조사와 부과를 개시하며 중국에 대한 고삐를 조였다. 나아가 미국은 중국의 숙원인 'WTO내 시장경제국 지위 인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한국도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제안한 것은 물론 한국산 등 수입 태양광 전지에 대해 지난 15년간 사용하지 않은 미 무역법 201조에 따른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적용을 시도했다. 나아가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11월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 권고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55년간 단 한 차례만 적용한 것으로 알려진 법 조항을 꺼내 들기도 했다. 지난 4월 무역확장법 232조(안보이유 수입제한)에 따른 조사의 칼날을 수입철강에 들이댄 것이 그에 해당한다.
이런 미국의 강공은 대응조치를 부르며 확전 양상이다.
캐나다는 상반기에 작년 같은 기간(3건) 대비 급증한 8건의 반덤핑조사에 착수했다. 나프타 재협상을 시작한 캐나다와 미국은 올 들어 캐나다산 일부 항공기와 목재, 미국산 치즈원료용 우유 등을 놓고 충돌했다.
중국도 지난 8월 미국이 지재권 침해 조사를 시작한 직후에 미국과 유럽연합 등에서 수입하는 타이어원료인 수소첨가 부틸고무(HBR)에 대해 반덤핑 조사에 착수하며 맞섰다. 중국이 상반기에 시작한 반덤핑조사도 9건으로 작년의 4배를 넘었다.
나아가 중국은 미국이 다자무역체제에서 발을 뺀 틈을 타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미국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중국이 사실상 무산될 위기에 처한 TPP 대신 자국이 중심이 된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 지난달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다자무역협정을 비판한 트럼프를 겨냥해 "세계화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며 다자주의를 통한 협력을 강조한 것도 중국의 야심을 드러내 준다.
겉으로는 자유무역을 외치고 있지만 중국 역시 자국이익을 우선시하기는 다를 바 없었다.
지난 12일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의 통상장관들이 보조금, 기술이전 강요, 현지부품 사용 요구 등 불공정 행위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중국의 비정상적 행태를 겨냥한 조치다. 중국의 인터넷 통제망인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은 외국기업을 당혹스럽게 하는 대표적 규제다.
자국 우선주의는 164개 회원국이 참가한 가운데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난 10~1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각국 통상장관들이 모였지만 공동성명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면서 WTO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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