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도심으로"…요즘 유럽에서 가장 '힙한' 도시의 건축 실험
네덜란드 로테르담서 뤼흐트싱얼·마르크트할 등 복합건물 봇물
개성·유연성 갖춘 건축 눈길…미래 대비한 다양한 주거실험도
(로테르담=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여닫이식 나무문 엘리베이터는 건물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보여줬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달하자 구수한 냄새가 밀려왔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핫플레이스인 식당 옵 헷 닥(Op Het Dak)이다.
옵 헷 닥은 네덜란드어로 '옥상에서'를 뜻한다. 이 식당이 특별난 이유는 식당 주변을 둘러싼 유럽 최대의 도심 속 옥상 텃밭이다. 요리의 대부분 재료는 이 텃밭에서 키운 작물들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로히어르 반 동크는 창밖을 가리키며 "주방에서 열 발자국만 걸어나가면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십여 개 메뉴 중에서 붓다 볼이라는 이름의 퓨전한식인 김치볶음밥은 우리 입맛에도 충분히 맞았다.
손님이 끊이질 않는 옵 헷 닥은 로테르담 중심부 재생 프로젝트인 뤼흐트싱얼이 만들어낸 풍경 중 하나다. 서로 단절된 채 쇠락해가던 지역은 2015년 400m 길이의 보행자용 다리로 연결되면서 되살아났다.
로테르담은 인구 62만 명(시내권 기준)의 네덜란드 제2 도시이면서 유럽 최대 무역항이다. 도시 중심부는 1940년 독일 공습으로 잿더미가 됐다. 전후 그 자리에 개성 넘치고 실험적인 건축물들이 속속 들어차면서 네덜란드 건축수도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점점 늙어가던 도시는 수년 전부터 '지속가능한 건축'으로 다시 활기를 띠는 중이다. 미국 CNN은 최근 로테르담을 두고 '멋을 보여주는 유럽의 새로운 중심'이라고 격찬했다. 이달 초 네덜란드 정부 초청으로 로테르담 곳곳에서 일어나는 건축과 삶의 실험 현장을 돌아봤다.
요즘 로테르담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물은 마르크트할(마켓홀)이다. 재래시장과 공동주거를 결합한 이 건물은 서울로를 디자인한 네덜란드 건축사무소 MVRDV가 설계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식품점과 음식점, 카페마다 사람들이 북적댔다. 딸기 케이크를 산 대학생 담라는 "여기는 이제 로테르담의 아이콘이 됐다"라면서 "한 달에 한두 번은 디저트 먹으러 오는데 가격이 비싼 것이 조금 흠"이라며 웃었다.
롤케이크 형태의 독특한 외관, 산뜻한 인테리어, 실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느낌은 인기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현장을 안내한 MVRDV의 이교석 건축가는 "야외 시장을 실내로 끌어들인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핵심 콘셉트"라면서 "이를 위해 투명한 유리를 사용하고 케이블로 이를 지탱했다"고 말했다.
시장을 감싸는 아치형 건물이 230여 가구가 거주하는 아파트다. 중년 여성 니콜이 사는 최고층에 도착하자 창문 아래로 가게들이 내려다보였다. 평형에 상관없이 모든 집에서는 시장과 도시 풍경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니콜은 "복합건물에 사는 것은 처음인데 필요할 때마다 내려가서 장도 보고 식사도 할 수 있어 편리하다"며 만족스러워했다.
2014년 10월 개장한 마르크트할 방문객 수는 매년 1천만 명에 이른다.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여는 시장과 주민 수백 명이 드나드는 아파트는 주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다품종 소량 고급 제품으로 승부하는 마르크트할은 일주일 두 차례 코앞에서 열리는 소품종 대량 위주인 재래시장과도 동반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한때 고가 도로 아래 마약과 성매매로 그늘졌던 지역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다. 쇠락한 도시 전체를 살려낸 '빌바오 효과'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마르크트할을 비유하는 언론 보도까지 나올 정도다.
마르크트할이 주거공간과 전통시장의 결합체라면, 도보로 10분 거리인 티메르하위스는 주거공간과 공공시설을 합쳤다. 로테르담 시 당국은 1953년 지어진 시청사를 무턱대고 허물지 않았다. 거장 렘 콜하스가 이끄는 건축사무소 O.M.A는 낡은 시청사 일부와 현대 건축물을 결합하는 식으로 숙제를 풀었다. 투명한 상자를 쌓아올린 듯한 독특한 외관은 마르크트할에서도 발견되는 로테르담 건축의 개성 넘치는 조형성을 말해준다.
마르크트할, 뤼히트싱얼 등을 앞세워 가장 '힙한' 도시로 떠오른 로테르담의 변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을 도심으로 다시 불러 모으려는 움직임이다.
"여기에서도 1960~1970년대에는 도심에 사무실을, 교외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지어 분리했어요. 처음에는 교외 주거단지에 백인 중산층이 살았지만 이들은 소득이 오르면 새 주거지로 옮겨가는 특성이 있죠. 기존의 교외 단지는 슬럼화가, 도심은 공동화가 촉진되는 결과가 빚어집니다. 최근 움직임은 그러한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죠." 이교석 건축가 설명이다.
그 대표적인 방법의 하나가 복합건물 건설이다. 우리네 주상복합처럼 지하와 1층은 상업시설, 2층부터는 주거공간 식으로 단순히 층층이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하이브리드하게 결합한 것이 그 특징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건축가와 행정가, 시민의 입에서 빈번히 나온 단어가 '유연한'이라는 뜻의 '플렉서블'(flexible)이었다. 복합건물 안에서도 언제든 필요에 따라 용도를 변경할 수 있는 열린 건축은 그 유연성을 보여준다. 티메르하위스나 에라스무스 강가에 자리 잡은 드 로테르담(De Rotterdam)은 모두 개별 공간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설계됐다.
유연성은 "우리는 물과 싸워 이긴 민족"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환경적 제약을 딛고 적응하는 건축의 바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옵 헷 닥 옥상 텃밭의 역할 중 하나는 식당이 입주한 스히블록 건물의 수자원 관리다. 국토 대부분이 바다보다 낮아 홍수와 해일 피해가 큰 네덜란드에서는 수자원 관리가 필수적이다. 티메르하위스에서도 투명한 유닛을 계단식으로 쌓은 덕분에 집과 사무실에서 모두 정원을 가꿀 수 있다. 이 건물을 관통하는 거대한 아트리움들은 열기와 냉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크트할은 주변 건물에까지 에너지를 제공하는 난방·축열 시스템으로 세계적인 친환경 인증인 영국 브리암(BREEAM) 인증을 받았다.
도심재생의 주체도 로테르담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뤼흐트싱얼이나 폐공장을 헐지 않고 특색 있는 푸드코트로 바꾼 페닉스 푸드 팩토리는 건축가, 시민단체 등이 모여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결과다.
옛 조선소를 개조한 혁신센터(ICDuBo), 공업지대에 들어서는 콘셉트 하우스 등에서는 에너지 자급자족, 자연환기 등 지속가능한 건축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주거실험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로테르담의 전방위적인 실험은 동시대 지속가능한 건축과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의 도심재생에도 주는 의미가 크다.
"네덜란드 건축은 기본적으로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려면 건축물은 단순히 보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변 이웃, 그리고 환경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프레트 스호를 네덜란드 왕립건축가협회 이사)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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