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작아진 독일 메르켈 "세계가 우리의 행동 기다린다"

입력 2017-12-12 14:50
목소리 작아진 독일 메르켈 "세계가 우리의 행동 기다린다"

존재감 약화… 대연정 협상 앞두고 "속도감 있는 논의" 강조

소수당 파트너 사민당 "느슨한 대연정" 등 대안 선택도 거론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 '유럽의 여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어디 있는 것인가.

고립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자 한때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대표주자인 양 취급받던 그다.

그러나 집권 4기 도전에 성공한 듯 보였던 그가 차기 연립정부 구성에 애를 먹으면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의제에 왕성하게 발언권을 행사하던 종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틈에 유럽에선 그나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 맞선 유럽의 스피커로 볼륨을 키우는 형국이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 등 독일 언론은 11일 그렇게 위축된 메르켈 총리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지를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며 13일 스타트를 끊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의 연정 구성 협상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자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집권 다수 기독민주당ㆍ기독사회당 연합을 이끄는 메르켈 총리는 또한, 큰 용기와 신뢰를 강조한 뒤 "안정적" 정부 구성에 대한 집착을 거듭 드러내며 불안정한 소수정부나 결과를 알 수 없는 위험이 있는 재선거에 재차 거부감을 보였다고 SZ는 전했다.

기민당 지도부도 이날 모임에서 '포스트 메르켈' 시대 주자로 일부에서 거론되는 옌스 슈판 최고위원 등이 주창한 소수정부론을 일단 배제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메르켈 총리는 이처럼 당내 이견을 억제하면서 복지 안정, 디지털화, 동등한 생활조건 구현, 유럽 발전 등에서 사민당과 정책 교집합이 많다고 짚고 의욕적인 대연정 협상 의지를 밝혔다.



그는 하지만, 공보험과 사보험으로 찢긴 이원적 건강보험을 통합재정을 구현하여 '시민(국민)보험'으로 일원화하자는 사민당의 제안에는 반대하며 제도 보완을 추진하자고 했고, 국내외 안보와 난민 정책에 대해선 기민기사연합 색깔 위주의 정책 관철을 다짐했다.

건보 일원화는 내년 3월까지 유예된 난민 가족 수용 재허용, 고소득자 세 부담 강화 등과 함께 사민당이 가장 강력하게 앞세우는 정책이다.

메르켈 총리는 마르틴 슐츠 사민당 당수가 내놓은 유럽합중국 계획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밝히고, 대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일찌감치 제시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강화 계획에 더해 프랑스와의 엘리제 협약 수정ㆍ보완, 2025년까지 독일ㆍ프랑스의 공동 법인세 입법, 디지털화 협력, 군사장비 수출 지침 통합 등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메르켈 총리의 기민한 움직임에 자매 정당인 기사당의 알렉산더 도브린트 연방의회 의원그룹 대표는내년 1월 말까진 대연정 성사 여부를 가늠할 수 있게끔 협상해야 할 것이라며 지원 사격했다.

이에 맞서 사민당은 연방의회 의원총회를 열어 대연정에만 매달리지 않겠다며 소수정부 혹은 '열려 있는 계약서' 작성에 근거한 느슨한 대연정 가능성도 함께 거론하고 나섰다.

슐츠 당수가 새로운 개념으로 내놓은 느슨한 대연정은 합의된 프로젝트와 여타 미합의된 의제를 공개적으로 인지하게끔 계약서를 쓰고 이를 기반으로 이견 있는 정책은 원내 토의와 협상으로 처리해 나가는 형태의 정부를 말한다.

2013년 출범한 지금의 대연정은 추진 정책과 각료 배분 등에 관한 185쪽 계약서에 서명하고 가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계약서 분량이 늘어난 건 극히 세부적인 정책까지 합의하여 서술하고 집권 4년간 완성할 입법과제까지 나열했기 때문인데, 사민당 내부에선 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았다. 비판이 나오는 건 지지를 확장할 좋은 정책을 많이 입안한 주체는 사민당이었는데도, 정책을 주도한 주체가 모호해 지고 그 과실은 오히려 기민당과 메르켈 총리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실제로 그게 대연정의 여러 함정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사민당의 청년당원과 많은 지지자가 대연정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배경을 깔고 있으며 그래서 슐츠 당수의 느슨한 대연정 언급에 눈길이 간다.

슈피겔 온라인은 일례로 최저임금제 시행에 결국에는 누가 책임이 있는지가 많은 시민에겐 불명료했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제는 사민당이 주도하고 기민기사연합이 동의하여 실행된 핵심 의제였다.

슐츠 당수는 느슨한 대연정을 두고 "지금의 사회 흐름으로 볼 때 4년간 그런 정부협력 형태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서 "그게 사민당 내 많은 이들이 갈 수 있는 하나의 다리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대연정 협상은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수뇌부의 13일 첫 회합, 사민당 지도부의 15일 협상안 조율, 양 정파 간 협상 개시에 관한 큰 틀 합의 시 1월의 본격 협상, 그리고 이후 타결 시 사민당 당원 투표 같은 시간표 아래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un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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