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지 '브랜드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인류학자 정헌목 신간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특별한 의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전국 아파트는 1960년 이래 처음으로 1천만호를 돌파하며 전체 주택 중 60%가 넘는 비율을 차지했다. 인구의 절반 이상, 도시민의 70%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주거 문화의 중심이 된 아파트는 선망의 대상이자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장 확실한 자산 증식의 수단이지만 한편으로는 '집단이기주의의 온상',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라는 시선도 많다.
인류학자 정헌목이 내놓은 신간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반비 펴냄)는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대해 가치판단에서 벗어나 인류학의 관점에서 접근한 책이다.
저자는 2001년초부터 2년 가까이 직접 수도권의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에서 인류학의 연구방법인 현장연구(fieldwork)를 통해 브랜드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에서 입주민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했다.
책은 연구결과를 수도권 소재 연주시 강산구 성일동에 있는 '성일 노블하이츠'라는 가상의 아파트를 내세워 소개한다.
5천여 가구였던 성일 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한 이 단지는 최저 15층, 최고 35층, 60개동 5천여 세대의 대단지로 지하에만 주차장이 있는 소위 '차없는 단지'다. '연주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의 단지 외곽에는 방음벽이 있고 단지 출입구마다 차량을 통제하는 차단기가 있어 주변 도시공간과 물리적으로 분리된다.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책은 성일노블하이츠의 재건축 과정부터 이후 이 단지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브랜드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삶의 양식과 주민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재건축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강력한 동력은 아파트 단지의 경제적 가치 극대화였다. 보일러나 엘리베이터 업체 선정이나 벚나무를 심는 문제는 아파트 단지에 어떤 브랜드를 붙이느냐 하는 논의에 압도됐다. 단지 조경은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최대한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문제였다. 이 기간 입주예정자들의 행동 양상에는 아파트를 '살아가기 위한' 공간보다는 '사고팔기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드러나고 생활공간에 대한 인식은 입주 후 시작된다.
아파트를 지배하는 문화 중 하나는 '무관심의 문화'다. 많은 주민은 이웃에 대해서도, 아파트 단지의 현안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입주자대표회의는 법적 근거가 있는 자치기구지만 주민들은 '내가 나서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발 벗고 아파트를 위해 나서주길' 원한다.
무관심의 문화가 지배하던 성일노블하이츠에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8살 어린이가 후진하던 음식물 수거차량에 치여 숨진 사건은 아파트에 대한 별다른 귀속의식이 없던 젊은 주민들에게 집단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을 일깨운 계기가 됐다. 아파트 현안에 참여해달라는 여러 목소리에도 무관심했던 주민들이 결속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아파트가 투자대상이나 일시적인 주거지로 여겨진다 해도 결국 삶이 영위되는 장소이고 다수가 함께 살아야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적 각성'들의 계기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책은 최근 일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아파트 공동체 논의에 시사점을 던진다. 아파트 단지가 지닌 사회적·공간적 특징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아파트 공동체 지원사업은 공동체성을 키우기보다는 일부 입주민들의 소모임 운영을 위한 재정적 지원 정도에 그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파트 공동체와 관련한 논의를 현실의 조건에 맞게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아파트 공동체와 관련한 문제 해법은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384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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