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중동 분쟁의 화약고로 떠오른 예루살렘(종합)
유대교·이슬람교 공동 성지…이-팔 모두 수도로 삼고 싶어 해
이스라엘, 1967년 예루살렘 점령후 본격 쟁점화
(카이로=연합뉴스) 한상용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의 역사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 의제인 예루살렘 지위 문제는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1917~1948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해 이스라엘이 1967년 중동전쟁 후 강제 점령하면서 본격 쟁점화됐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지로 꼽히는 도시여서 장차 어느 쪽이 이 도시를 차지할 것인지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동의 아랍권 국가는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해 왔다.
예루살렘 올드시티(구시가지)에는 이슬람·유대교의 공동 성지 '템플마운트'(아랍명 하람 알샤리프)가 있어 이-팔 모두 수도로 삼고 싶어한다.
템플마운트는 이슬람 3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알아크사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위치한 곳이자 유대교도에는 솔로몬왕의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던 곳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절대다수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 주축인 이스라엘은 이곳을 종교와 국가의 상징으로 간주하며 팽팽한 기 싸움을 벌여 왔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의 뿌리는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국가를 세운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은 이스라엘 건국을 앞두고 이-팔 갈등과 중동 전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문제로서 예루살렘의 지위를 신중히 검토했다.
그 결과 유엔은 영국의 신탁 통치령 지역인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도록 한 1947년 총회 결의안을 통해 예루살렘을 어느 쪽 소유도 아닌 국제도시로 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요르단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인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舊)시가지가 포함된 동쪽을 관리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간 장기간 대치 속에 분단 상태를 유지해 왔다.
이스라엘은 이후 주변국인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관련된 4차례 중동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또는 6일 전쟁)에서 승리해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함께 동예루살렘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잠정자치 허용을 골자로 하는 오슬로 협정을 1993년 체결하고도 동예루살렘과 서안에서의 정착촌 확장과 분리장벽 건설 등으로 일부 점령지를 자국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병합한 뒤 이 일대에 정착촌을 짓고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정책도 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조치는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 불법 조치였다.
팔레스타인은 이때 빼앗긴 성지를 건국시 수도로 삼겠다고 주장했으나 이스라엘은 안보 등을 이유로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예루살렘 점령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에후드 바라크 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의 아랍지역과 구시가의 대부분에 대한 제한적인 자치허용을 제안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예루살렘의 지위는 지난 50년간 이-팔 간 평화 협상에서 주요 걸림돌로도 작용했다.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선 과거 중동 평화 노력도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 등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지속해서 동예루살렘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한 데 맞서 팔레스타인 측도 인티파다(대규모 민중봉기)와 이스라엘인을 겨냥한 총기·흉기 공격 등으로 대응했다.
예루살렘을 바티칸처럼 독립된 국가로 지정하는 방안도 한때 논의됐으나 이스라엘의 점령 지속으로 사실상 이러한 논의도 무산됐다.
예루살렘에는 현재 이스라엘 총리 공관을 포함해 주요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외국 대사관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아닌 지중해와 맞닿은 경제 도시 텔아비브에 주재해 있다. 예루살렘의 전체 인구는 약 88만명으로 이 가운데 60% 정도는 유대인, 30~40%는 아랍인으로 추산된다.
gogo213@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