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제주 속살 보여주는 오름과 숲

입력 2017-12-08 08:01
[연합이매진] 제주 속살 보여주는 오름과 숲

(제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제주에 홀려 제주 사진만을 담았던 고(故) 김영갑 사진작가는 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오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고백한다. 오름은 자그마한 화산을 의미하는 제주어로,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섬 전체에 흩어져 있다. 오름은 그리 높지 않고 주변 경관도 감상할 수 있는데 그 이름 또한 새별오름,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군메오름 등 다양하고 독특하다.

거문오름(456m)은 1년 동안 하루에 한 개씩 올라도 다 못 오를 정도로 많은 오름 중에 으뜸으로 꼽힌다. 나무가 무성해 검게 보인데서 이름 붙여진 거문오름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모태다.

김명자 자연유산해설사는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벵뒤굴, 만장굴, 당처물동굴, 용천동굴 등을 거쳐 바다로 흘러내려 갔다"면서 "거문오름은 북동쪽 산사면이 터진 말굽형의 형태로 다양한 화산지형들이 잘 발달해 있다"고 말한다.

천연기념물 제444호인 거문오름은 2009년 환경부 선정 생태관광 20선, 2010년 한국형 생태관광모델 10선, 2013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될 만큼 생태관광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거문오름 탐방은 사전예약제로 하루 입장객을 45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자연유산해설사와 함께 탐방할 수 있는데 오름의 나무나 흙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등산화나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우산, 스틱, 아이젠 등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물 이외의 음식물은 반입할 수 없다.

탐방로는 분화구 위에서 주변만 조망할 수 있는 정상 코스(1.8㎞, 1시간), 분화구 내의 알오름과 역사유적지를 두루 볼 수 있는 분화구 코스(5.5㎞, 2시간 30분), 분화구와 정상을 둘러보는 전체 코스(10㎞, 3시간 30분) 등 3개 코스로 나뉜다.

탐방로에 들어서면 맨 먼저 아름드리 삼나무 군락이 반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게 뻗은 나무를 올려다본다. 하늘을 배경으로 푸르게 솟은 나무는 생(生)이 얼마나 경건하고 아름다운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에 귀가 맑아지고 마음의 티끌마저 사라진다. 전망대에 오르자 탐방객들은 "쾌청한 날씨 덕에 단풍 옷을 갈아입은 한라산과 정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어 정상에 오르자 백록담보다 큰 말굽 모양의 분화구와 깊게 팬 분화구 안에 알을 품은 듯 솟아 있는 알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1코스 끝이자 2코스 시작점에서 용암협곡(폭 80∼150m, 깊이 15∼30m, 길이 2㎞)으로 들어서면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곳곳에 용암 함몰구, 지층 변화로 생긴 구멍인 풍혈, 항아리 모양의 수직동굴 등 화산활동의 흔적이 신기하게 느껴지고, 용암이 남긴 신비한 지형 위에 나무와 덩굴식물이 엉켜 있는 곶자왈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김명자 해설사는 "제주만의 독특한 용암지형인 곶자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곳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말해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파놓은 갱도 진지와 숯가마 터는 제주민의 아픔과 슬픔,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분화구 코스를 걷는 내내 햇빛과 그늘이 번갈아 탐방객을 반겼고, 돌과 나무와 덩굴 식생이 신령스런 분위기를 더해준다.



◇ 천년의 세월 오롯이 간직한 비자림

숲으로 향하는 길은 설렌다. '천 년의 숲'으로 불리는 비자림(榧子林·천연기념물 제374호)은 수령 500∼800년 된 비자나무 2천8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고, 겨울에도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아 초록빛 일렁이는 숲을 유지한다.

김봉주 자연유산해설사는 "1만여 그루에 이르는 비자나무는 단순림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며 "비자나무가 집단으로 몰려 살다 보니 조그만 공간만 생기면 서로 가지를 내밀어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생존경쟁이 어떤 곳보다 심하다"고 말한다.

매표소에서 100년 전 벼락이 떨어졌다는 '벼락 맞은 비자나무'를 거쳐 붉은빛을 띠는 자갈 형태의 화산석 부스러기인 송이가 깔린 탐방로에 들어서면 독특한 비자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탐방객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주위 나무들과 경쟁하면서 꿋꿋이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들어 낸 숲 앞에서 경건해 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수피에 붙어 자라는 착생식물 중 비자나무에 붙어서 더부살이를 하는 콩짜개덩굴은 마치 비늘로 덮인 거대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숲 한가운데에서는 고려 명종 29년(1189)에 심었다는 비자나무가 세월의 무게만큼 묵직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키 14m에 둘레가 2m는 넉넉히 될 듯한 이 나무는 2000년도에 '새천년 비자나무'로 지정됐다. 노장다운 기품이 느껴진다. 나무를 안고 숲의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기나긴 세월을 이야기해 보고 싶어진다.

비자나무는 1년에 고작 1.5㎝ 정도밖에 안 크는 주목과에 속한다. 잎은 바늘모양처럼 생겼고, 목재는 바둑판이나 고급 가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두 그루가 붙어 한 몸으로 자란 연리목 앞에는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여행객들이 많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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