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첫 채택 서핑 장비 기술은 군용에서 왔다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국내에서도 동호인이 늘어나고 있는 서핑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됨에 따라 앞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자연 파도가 아닌 인공 경기장에서 벌이는 서핑 시합이 올림픽에서 이뤄지는 경우도 생길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국제 프로 서핑 협회인 월드서핑리그(WSL)는 전설적인 선수 켈리 슬레이터가 미국 캘리포니아 르무어에 건설한 인공파도 경기장 서프 랜치에서 인공파도가 고난도 기술을 펼치기에 적합한지 시연하는 행사를 지난달 열었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의 운동학·보건교육학과 조교수 톨가 오져트쿠는 6일(현지시간) 외교안보분석업체 스트랫포의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자연과의 동화, 혹은 교감에 애착하는 동호인들의 문화 때문에 인공 파도타기 인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지만, 서핑의 역사와 장비 자체가 '자연'과 어울리지 않게 지정학 및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서핑은 올림픽 종목으로 갓 채택됐지만, 실제 역사는 레슬링과 육상에 버금갈 정도이며 정신적 고향이라는 하와이에서의 역사도 지금부터 1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와이에서 성행하던 파도타기는 1800년대 초 칼뱅파 선교사들이 대거 하와이로 이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이유로 금지하면서 위축되기 시작해 20세기 직전엔 거의 맥이 끊기는 상태까지 갔다가, 이후 와이키키 등에 근대적 휴양지를 짓기 시작한 미국 사업가들이 관광객 유치용 해변 놀이로 되살려냈다.
1907년 남캘리포니아 농장주가 하와이의 파도타기 선수를 로스앤젤레스로 초청, 보급한 것을 계기로 서핑은 급속하게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태평양 지역을 거쳐 전 세계로 퍼졌다. 캘리포니아가 현대 서핑의 발상지로 알려지게 된 계기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가처분 소득이 늘고 항공 여행이 발달함에 따라 서방의 애호가들은 전 세계의 파도 정복에 나섰다. "가장 질 좋은" 파도를 찾아 흑백 인종 차별주의 시절 남아공이나 중미의 내전 지역같이 지정학적으로 긴장된 곳도 마다치 않았다.
냉전 시절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비동맹 정책을 버리고 미국과 손잡으면서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서핑 시합과 여행을 지원하고 나서자 미국과 호주의 애호가들은 자국민을 탄압하는 수하르토의 독재 정치에 눈감고 인도네시아의 놀라운 파도에 몸을 싣기도 했다.
오져트쿠 교수는 1979년 작 베트남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서핑을 위한 안전 확보를 위해 즉흥적으로 네이팜탄으로 한 마을을 파괴하는 장면을 거론, "서핑의 전형적인 감성은 평화로운 자연과의 동화여서 전쟁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탓에 충격적"이라며 파도타기와 전쟁 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 군산 복합체가 이룬 재료기술 덕분에 서프보드 제조업자들은 섬유 유리, 폴리에스테르 수지와 각종 발포 고무로 기존의 무거운 나무 대신 가벼운 보드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여성과 어린이들도 즐길 수 있게 됐다.
1940년대와 50년대 초 뛰어난 속도와 묘기를 펼칠 수 있도록 서프보드 모양에 혁명을 만들어낸 이도 미 육군 기계병 출신이다. 미 해군이 일본 본토 상륙 공격용으로 개발했던 모터 달린 '전투 보드'는 민간의 서프보드를 군용으로 전환하려 한 시도였다. 이 전투 보드는 실용화되지는 않았다.
파도타기 할 때 입는 잠수복은 원래 1950년대 초 미 해군용으로 개발됐으나 합성고무의 일종인 네오프렌 재료의 특성상 수중음파 탐지기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점 때문에 군용에서 탈락하고 민간용으로 변신한 것이다.
오져트쿠 교수는 "어쩌면 파도타기용 인공파도를 보면서 해군에선 무기 혁신을 위한 완벽한 실험장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쟁과 스포츠 간 기술 공생관계를 지적했다.
yd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