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 문화("내 별로 안 늙었지요"…'소리꾼' 나훈아…)
"내 별로 안 늙었지요"…'소리꾼' 나훈아, 눈물의 컴백 공연
11년 만의 콘서트 '드림 어게인'…절창·입담에 3천500여 팬 환호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핑크 재킷을 걸치고 마지막 곡 '내청춘'을 부른 나훈아(70)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감회에 찬 듯 객석을 올려다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부리부리한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쥔 그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른 치아를 드러내고는 특유의 미소를 던졌다. 그리고는 무대 위 계단에 올라 큰절을 했다. 3천500여 관객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손뼉 치며 "나훈아 오빠"를 외쳤다.
가수는 꿈을 파는 직업인데 꿈을 잃어버렸다며 무대에서 내려간 지 11년. 오지를 다니며 지구 다섯 바퀴를 돌았다는 그는 다시 그 꿈을 찾은 듯 감격했다. 건강이상설을 불식시키고 민소매 셔츠와 찢어진 청바지가 여전히 어울리는 야성미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팬들은 아낌없이 환대했다.
'트로트 지존' 나훈아(70)가 3일 오후 7시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드림 어게인'(Dream Again)이란 타이틀로 11년 만의 컴백 공연을 열었다.
"하나, 둘, 셋 나훈아"라는 외침과 함께 장막이 걷히자 팬들이 그토록 그리던 나훈아가 눈앞에 나타났다.
허공에 레이저 조명으로 '드림 어게인', '더 맨스 라이프'라는 영어 글자가 나타나더니 별이 깨알같이 박힌 무대에서 그는 기타를 연주하며 '반달'을 부르고 있었다. 짱짱하게 뻗어 가면서도 강약을 조절하고, 리듬과 '밀당'하는 소리꾼의 육성에 객석은 첫 곡부터 '떼창'을 이뤘다.
그는 전반부, 지난 7월 발표한 새 앨범 '드림 어게인'의 신곡과 대표곡을 섞어 약 10곡을 한마디 말도 없이 노래로만 끌고 갔다. 한 손으로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홍시', '너와 나의 고향', '아이라예',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을 절창으로 쏟아냈다.
선글라스에 검정 망토를 두르고 가면을 쓴 댄서들과 역동적인 무대를 꾸미는가 하면, 세 명의 여자 코러스와 차례로 춤을 추고, 코끝을 찡그리고 마치 연기하듯 노래하며 가볍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팔을 뻗어 좌우 객석을 가리킬 때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 팬들이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아이돌 팬처럼 함성을 쏟아냈다.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향해 지휘하던 그가 객석으로 돌아서 '잊으라 했는데/ 잊어달라 했는데'라며 '영영'의 첫 소절을 떼면 다시 떼창을 이뤘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특유의 위트와 재치는 감탄을 자아냈다.
팬들에게 첫 인사를 뭐라 할지 난감했다는 그는 자작곡 '예끼 이 사람아'를 만들었다고 했다. 스크린에는 '1절은 팬들이 저를 질책하는 내용이고 2절은 저의 마음을 솔직하게 담아 부르겠다'는 자막이 떴다.
'소식 한번 주지 않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이 몹쓸 사람 오랜만일세'(1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2절)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지면서 "괜찮아"란 외침이 쏟아지자 나훈아가 첫 마디를 뗐다.
"얼굴 찡그리고 살기엔 인생이 짧습니다. 확실하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미안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괜찮다 하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것 저 구석에 처박아두고 얼굴 두껍게 해서 내 오늘 알아서 할 낀 게. 노래를 11년 굶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하자면 밤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칩거하는 동안 보따리를 둘러메고 지구 다섯 바퀴를 혼자 돌았다는 그는 남미를 가기 위해 미국에 들렀을 때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한인 라디오에서 '사나이눈물'이 나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면서 '사나이눈물'을 노래했다. "잘 한번 해보겠다"던 그는 세 번이나 울컥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지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올해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피살된 북한의 김정남 얼굴을 스크린에 띄우고는 "난 정치를 모르지만 이 사람이 생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10번 불렀다고 한다"며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지금 마흔 살 안쪽으로 되신 분들은 먹고사는 기 얼마나 어려운 걸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라며 "우리 어무이 아버지들 좋아하실 수 있는 노래를 준비했다"면서 기타 두 대의 연주에 맞춰 '울어라 열풍아', '추풍령', '나그네 설움', '옥경이'를 메들리로 들려줬다.
히트곡만큼 빛을 발한 것은 유머를 섞은 경상도 사투리의 입담이었다. "내 별로 안 늙었지요", "우짜다 이리 늙었노"라며 마치 오랜 친구에게 건네듯 팬들에게 스스럼없는 말투였다.
"공연장 로비에서 판을 판다카데. 사지마이소. 공연 푯값도 비싼데 고마 사지마이소. 보기만하고 모른척하고 지나가이소. 근데 시중보다 15% 싸다카데예."
"11년 전에 내가 공연할 때 세상에서 가장 늦게 아 놓은 할매가 육십서이였어요. 11년이 지나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할매 산모가 칠십서입니다. 제왕절개가 아니고 고마 알아서 낳은기라. 지금부터 내가 청춘을 돌려드릴 테니 알아서 받는 사람은 아 놓을 수 있고, 못 받는 사람은 아도 뭐고 계속 늙을 끼니 알아서 하이소."
나훈아는 이날 전설다운 공력을 보여주면서도 요즘 감각에 뒤지지 않는 현재진행형 가수임을 과시했다. 여느 때처럼 직접 연출한 공연은 영상과 무대 미술까지 세심하게 신경썼을 정도로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오케스트라와 밴드, 코러스와 댄서를 무대 안에 자연스럽게 녹인 연출, 화려한 비디오아트, 대규모 물량을 투입한 조명과 특수효과를 통해 마치 뮤지컬처럼 무대를 구현했다.
마지막 부분 그는 소리꾼답게 한복 차림에 부채를 들고 등장해 자작곡 '공'을 들려줬다. 늘 "우리 대한민국만 얘기하는 소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그였다.
이날 공연에는 50~60대 중장년 팬들이 공연 시작 3~4시간 전부터 설렌 발걸음으로 일찌감치 모여들었다.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노년의 신사,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 홀로 와서 친구가 됐다는 60대 여성 등 이날만을 기다린 팬들이었다. 야광봉이나 '최고 가수 나훈아', '훈아 오빠 짱'이란 피켓을 든 팬들도 눈에 띄었다.
16주년을 맞은 공식 팬클럽 '나사모'(나훈아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은 전날부터 천막을 치고 나훈아를 응원했다.
회원 김인주(56) 씨는 "나훈아 씨는 단순히 가수라기보다 노래에 철학과 혼을 넣는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치켜세웠다.
아들이 예매해줘 혼자 왔다는 60대 이모 씨는 "중학교 때 나훈아 씨의 극장식 쇼를 보러 갔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정학을 받기도 했다"고 수줍게 웃었다.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서울, 대구, 부산 공연 티켓 3만1천500장이 모두 팔려나갈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티켓 가격은 12만1천~16만5천원이다. '귀한 티켓'이 되자 티켓 사기 피해가 발생했고, 이날 공연장에도 암표상들이 "1층 객석을 40만 원에 판다"고 호객 행위를 했다.
이날 공연은 보안도 철저했다. 사진 촬영을 못하도록 입장하는 관객들의 휴대전화 렌즈에 보안스티커를 부착했다.
공연 직전 자막으로도 '공연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면 저작권 문제가 발생한다'며 '오랜만의 나훈아 얼굴을 스마트폰으로 보지 말고 눈으로 직접 보시라'는 안내를 했다.
이 공연은 4~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뒤 24~26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 12월 15~17일 대구 엑스코 컨벤션홀에서 이어진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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