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한양도성] 비운의 남산자락…'국치'를 생각하며 걷다

입력 2017-11-05 09:30
[가을엔 한양도성] 비운의 남산자락…'국치'를 생각하며 걷다

조선신궁 아래 뭉개진 한양도성…'현장 박물관' 만들어 공개

군사정권 땐 자유센터 건물 담장으로 활용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조선 수도 한양을 둘러싼 도성 18.6km 중 가장 우여곡절이 많은 구간은 남산이다.

남산은 일제가 경복궁에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일제가 남산에 여의도 면적의 2배가 넘는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한양도성은 잘리고 허물어졌다.

이후 군사정권이 1960년대 반공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자유센터(현 남산 제이그랜하우스)를 지으면서 도성 일부를 헐어냈다. 도성을 허는 과정에서 나온 돌로 자유센터 건물 담장을 쌓기까지 했다.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감상하며 걷기에 좋지만, 서울의 '다크 투어(dark tour·비극적 역사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것)' 중심지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다.





◇ 한양도성을 깔고 앉은 '조선신궁'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곳곳에 신사가 들어섰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조선 전역의 신사는 무려 1천141개에 이르렀다.

그중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이 가장 컸다. 일제가 조선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역점을 둔 곳이다.

일제는 1919년 남산 회현 자락에 부지 66만1천160㎡를 확보하고 1920년 신사 건립을 시작했다. 완공까지 5년이 걸렸다.

조선신궁은 일본열도를 창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모신 일본 신사의 총본부로, 1천141개 신사 중 '우두머리'였다.

일제가 숭례문에서 조선신궁까지 올라가는 참배로를 닦으면서 이 구간의 한양도성은 무참히 헐려 나갔다. 성곽을 부순 뒤 낸 찻길이 지금의 소월길이다.

신사 입구에서 본전이 있는 넓은 터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돌계단 384개를 놨다.

돌계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에 나와 유명해 진 뒤 '삼순이 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어 아픈 역사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위세가 당당했던 조선신궁의 역사는 20년 만에 끝이 났다.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튿날 바로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연 뒤 건물을 스스로 철거한다.





◇ 이승만 대통령 동상·남산식물원에 내준 자리

한번 훼손된 도성은 해방 이후에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조선신궁 터에는 1956년 이승만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60년 4·19 혁명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동상을 파괴한다.

1958년엔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에 있었던 국회의사당의 남산 이전이 추진된다. 1963년 현상공모를 거쳐 터 닦는 작업까지 했으나 이전이 무산됐다.

1968년 12월엔 남산식물원이 생겨 40년간 서울시민들의 휴식터로 사용되다 2006년 10월 철거됐다.

조선신궁 건립 이후 80년간 잊혀졌던 남산 회현 자락의 한양도성이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남산식물원 철거를 즈음해서다.

서울시는 2006년 조선신궁 건립 과정에서 일제가 파괴한 성곽 훼손 구간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한양도성 복원은 1970년대부터 진행돼왔으나 남산은 유실 구간을 찾지 못해 복원 대상에서 제외된 상황이었다.

2년여가 걸린 이 작업은 조선신궁이 들어서기 전인 1922년 제작된 지도 '경성부관내도'에 서울시 도시계획도와 항공사진을 중첩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2000년대에는 회현 자락에서 중요한 발굴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2013년∼2015년 발굴 조사에선 조선신궁 터의 땅 밑 3∼4m 아래 묻혀있던 성곽 기저부 190m가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구간에선 한양도성을 쌓기 시작한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숙종 때 진행된 보수 공사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진과 문헌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조선신궁 건물 중 배전(拜殿·참배객들이 절하는 장소) 터도 한양도성 바로 옆에서 나왔다.

한양도성 발굴 과정에서 질곡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 회현 자락에 2019년 말 '현장유적 박물관'

남산 회현 자락의 조선 신궁 터에선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일반 시민들이 출입하지 못한다.

서울시는 성곽을 복원해 다시 쌓을지, 훼손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서울시는 이곳에 '한양도성 현장 유적박물관'을 만들어 발굴된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원형 그대로 보여줄 계획이다. 현재 박물관 건립을 위한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 초부터 공사를 시작해 2019년 12월께 완공하는 게 목표다.

박물관은 한양도성 발굴과 보존 과정을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주변에는 안내센터를 만들고, 한양도성 탐방로도 정비할 계획이다.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훼손된 도성의 시기별 축성 기술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역사적 장소이고, 고고학적 연구 가치도 매우 높다"며 "박물관을 한양도성의 축성 기술과 보존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 남산에서 쫓겨난 국사당…지금은 팔각정이

백범광장과 남산 회현자락 발굴 현장을 지나 성곽을 따라 오르면 남산 정상에 이른다.

서울 도심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이는 남산 팔각정에도 수난의 역사는 깃들어있다.

팔각정은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남산의 산신을 모시려 지은 '국사당'이 있던 곳이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당이었던 이곳에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500년간 한 자리를 지켰던 국사당은 조선신궁에 밀려 인왕산으로 쫓겨가고 만다. 일본의 최고신과 살아 있는 신인 천황을 모시는 신궁보다 높은 자리에 식민지 나라의 사당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해방 이후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했으나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산 정상에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은 반얀트리호텔에서 다시 한 번 뚝 끊긴다. 도성이 반얀트리호텔 부지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반공 지도자를 기르고 정보 교환, 선전활동을 할 아시아민족반공연맹자유센터를 남산 장충동 일대에 지었다.

5개 건물로 이뤄진 자유센터 중 가장 남쪽에 있던 17층 높이 국제자유회관은 도성을 허물고 그 위에 지었는데, 이 건물이 현재 반얀트리호텔이다. 당시 허문 도성의 성돌은 여기저기 축대를 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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