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 보내고 다시 편 교과서…'80대 여고생'들의 졸업사진
평생학교 일성여중고 이명순·현종금·장일성씨 "소녀시절 기분"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못 해본 것을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요. 이 나이 먹어서 생각도 못 한 그런 걸 하니까. 소녀 시절로 가는 기분도 들고요. 마음 같아선 훨훨 날고 싶었어요."
학력인정 평생학교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에서 졸업사진을 찍은 이명순(86)·현종금(82)·장일성(82)씨는 24일 "소녀가 된 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평균연령 83.3세인 이들 만학도 3명은 내년 2월 영광의 졸업장을 받는다.
웃으며 학교생활을 떠올리지만, 이들에게는 저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회한이 있다.
장씨는 "소학교 1학년 2학기까지 다니다 해방이 돼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고 이후 6·25 사변이 나면서 동네 야학에서 한글을 배운 게 전부였다"며 "결혼해서 아이들을 기르고 부모님을 모시다 세월이 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도 "(소)학교에 가기 직전 해방되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며 "이후 초등학교만 나오고 말았는데 이게 항상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80대 트리오' 중 최고령인 이씨는 외국에서 겪은 곤혹스러운 경험 때문에 다시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이씨는 "몇년 전 독일에 있는 딸 집에 갔다가 쇼핑 도중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며 "배를 부여잡으며 설움을 한바탕 겪고 나니 '한국 가면 이놈의 영어를 꼭 배워야겠다' 싶었다"고 회고했다.
귀국 즉시 학교를 찾았다는 이씨는 "이젠 긴 것은 따라 읽기 어렵지만 짧은 것은 어느 정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를 영어로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토레이!"(토일렛(toilet), 화장실)라고 힘차게 외쳤다.
지인 권유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현씨는 "노인네들은 할 일이 없어 잠만 자거나 노인정에나 가야 하는데 학교라는 것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선생님들이 수업마다 새로운 말씀을 해주시는 게 정말 좋았다"고 엄지를 세웠다.
배우지 못한 아픔을 떨치고 어엿한 '고졸' 자격 획득을 앞둔 이들은 대학생이 될 꿈에 부풀어 있다.
장씨는 "아이들 키울 때 형편이 좋지 않아 주방 계통 일을 많이 했다"며 "그러다 보니 식품에 대한 지식을 더 알아야겠다 싶어서 식품경영학과나 영양학과 학생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미 수시모집에 합격해 대학 신입생 자격을 얻었다. 그는 "졸업사진을 찍는 중에 이미 한 대학에 붙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면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 다른 대학 어문학부 면접도 봤다"며 뿌듯해했다.
현씨도 "수능을 볼 것"이라며 "대학에 가면 사회복지학 또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기대했다.
일성여중고 강래경(35) 교사는 "어린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대부분 취업 등을 목표로 하지만 이분들은 오랜 기간 원했던 꿈을 이루려는 것"이라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가 쉽지는 않을 나이일 텐데 저도 그분들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마음이 젊고 꿈이 있는 분들"이라며 웃었다.
일성여중고는 구한말 지식인 이준(李儁) 열사의 고향 함경북도 북청 출신 실향민들이 1952년 설립한 야학이 시초다.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힘쓴 이 열사의 뜻을 기려 학교 이름도 그의 호 '일성'(一醒)에서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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