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나 "모델로, 디자이너로 함께 한 48년…옷은 내 인생"
'헤라서울패션위크' 명예 디자이너로 DDP에서 아카이브 전시
"새로운 소재, 색감, 라인 시도…살아있는 옷 만드는 게 목표"
(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루비나(69, 본명 박상숙)는 모델 출신으로서 가장 성공한 여성복 디자이너로 꼽힌다. 1970년대 잘 나가는 모델이었던 그는 1980년 디자이너로 전향,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디테일의 옷을 선보이며 명성을 쌓아왔다.
올해 데뷔 37주년을 맞은 그는 오는 16일 개막하는 '헤라서울패션위크'의 명예 디자이너로 선정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아카이브 전시를 열 예정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델 경력까지 합하면 48년 가까이 옷과 함께해 왔다"며 "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루비나가 옷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0년 명동 길거리에서 만난 한 디자이너에 의해 모델로 발탁되면서부터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는 서구적 외모와 큰 키 덕분에 패션쇼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데뷔 1년 만에 톱모델로 우뚝 섰다.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수로 데뷔해 음반을 두 장 내기도 했고, 고(故) 신상옥 감독에게 자신의 집을 촬영장소로 빌려준 것이 인연이 돼 그의 영화 '여형사 마리'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소심한 성격이었다"며 "모델 할 때도 너무 떨리고 긴장돼서 심장약을 먹고 무대에 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모델로서 최상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1980년 돌연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이제는 내려올 일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젊은 애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디스코 풍의 패션이 들어오면서 위기감이 느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옷에 대한 관심은 어렸을 때부터 유달랐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가 미싱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지요. 걸레 만들려고 내놓은 헌 옷을 몰래 가져다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입어보기도 했죠. 인형 옷 만드는 것도 좋아했고요.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목화솜을 치마에 가득 담는 태몽을 꿨다는데 그래서인지 제 일생을 옷과 함께 해왔네요."
1980년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보름간 두문불출하며 옷을 만들어 제일백화점 지하 4평 공간에 첫 매장을 열었다. 기존 브랜드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덕분에 초기 고객은 대부분 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독특한 색감의 유러피언 스타일을 좋아했다"며 "100명 중 한 명만 우리 매장에 와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옷을 만들었다"고 했다.
1980년 3월 '루비'라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시작한 그는 1982년에 남산 하얏트 호텔에서 연 개인 쇼를 계기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1983년 지금의 '루비나'를 정식으로 론칭했다.
지난 2월에는 '루트원'이라는 이름의 세컨드 브랜드를 출시하기도 했다. 50~60대가 주 고객층인 '루비나'와 달리 20~30대를 겨냥한 좀 더 대중적인 브랜드다.
"옷을 만든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래서 재미있어요. 항상 새로운 소재, 새로운 색감, 새로운 라인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에 지루함이 없죠."
그는 "옷에도 생명이 있다"며 "아무리 입어도 질리지 않는 옷, 살아있는 옷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의 옷은 다양한 소재와 기술을 접목한 독특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직접 염색을 공부해 독특한 염색 기법의 의상을 선보이기도 하고, 손으로 직조한 직물에 니트나 펠트를 접목한 옷을 만들기도 하는 등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옷을 만든다. 그는 "나의 내면의 집시적 기질이 옷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고 했다.
'끝없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37년간 그가 만들어 온 150여 벌의 의상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직접 프린트하고 염색한 원단들이 전등갓으로 변신해 만들어내는 빛의 터널, 수천 개의 핀자국이 남아있는 낡은 보디 마네킹 등 그가 쓴 재료와 도구를 활용한 설치미술도 전시장을 장식할 예정이다. 무료로 개방되는 전시는 오는 17일부터 내달 1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와 함께 패션북 '끝없는 여행'도 발간한다. 구본창, 한홍일, 이건호, 조선희 등 사진가 10여 명이 참여해 루비나의 작품 세계를 사진으로 펼쳐낸다.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모은 의상과 자료 등을 토대로 후학들을 위해 디테일에 관한 책도 만들 예정이다.
칠순은 앞둔 그는 "아직도 하루에 12시간은 일을 한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옷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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