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입력 2017-10-12 07:31
[김은주의 시선]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서울=연합뉴스) "풀은 하날 은하(銀河)물/ 하얀 쪽배엔/ 계수(桂樹)나무 한 나무/ 톡기 한머리/ 돗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업시/ 가기도 잘도 간다/ 서(西)쪽 나라로// 은하물을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대로 가나/ 멀니서 반짝반짝/ 비초이난 것/ 샛별등대(燈臺)란다/ 길을 차저라"

1924년 10월 20일 동아일보에는 윤극영이라는 21세 청년이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반달'이라는 동요가 발표됐다.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23년 9월 도쿄를 강타한 관동대진재 이후 처참한 조선인 대학살의 와중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귀국한 이 청년은 시집간 누이의 사망 소식까지 겹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반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외롭게 뜬 달을 보니 누이 잃은 슬픔에, 우리 민족의 서글픈 운명까지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노랫말과 곡조가 떠올랐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서둘러 오선지를 찾아 노래를 완성했다. 이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이자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는 민족동요 '반달'이다. '동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부터이다.





노랫말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다. 당시 '반달'의 가사 첫머리는 '푸른 하늘 은하수'가 아닌 '푸른 하늘 은하물'이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의 애달픈 운명을 그린 이 노래는 발표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창됐다. 당시 학교에서 우리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반달'은 워낙 호응이 컸던데다 일본인들까지 따라 부르는 바람에 당국은 금지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래는 일본과 만주까지 전파됐다.

윤극영은 1903년 9월 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출생했다. 교동보통학교 시절 노래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교사가 "윤극영보다 노래를 잘하면 12점을 주겠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1920년 졸업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교동보통학교 동창이자 외사촌인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법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 도요음악학교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923년 어느 날 도쿄 하숙집으로 한 청년이 찾아왔다. 네 살 위의 방정환이었다. 윤극영은 방정환과의 만남에서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어 일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색동회'가 조직됐다. 윤극영은 창립 동인이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노래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기 위해 동요 창작을 시작했다. 그는 1924년 귀국했다.

부친이 집 뒤뜰에 작은 별채를 짓고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곳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린이들을 모아 노래를 가르쳤다. 1924년 8월 이 어린이들을 모아 최초의 노래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창작 동요 보급에 나섰다. 고유의 명절인 설날에도 마땅히 부를 우리 노래가 없어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라는 '설날' 노래도 만들었다.

윤극영은 '반달'과 '설날'을 비롯해 '고드름,' '귀뚜라미,' '따오기,' '할미꽃,' '소금쟁이' 등 수많은 동요를 이때 작곡했다. 자신이 만든 노래들을 당국의 감시를 피해 등사판으로 몰래 찍어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보냈다. 이 노래들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게 됐고 총독부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1925년 3월 '다리아회'에서는 서울 시내 내청각에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최초의 아동 창가극을 공연했다. 이 창가극은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를 각색한 것으로, 박팔양이 번역하고 윤극영이 곡을 붙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윤극영은 '파랑새를 찾아서'를 공연할 때 피아노 반주를 한 오인경과 1926년 1월 만주 룽징(龍井)으로 떠나 10여년간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고등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또한, 백홍악단이라는 음악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제비 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외나무다리,' '담 모퉁이' 등을 작곡했다. 1936년 가을 서울로 돌아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극장 가수로 활동했다.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집 '반달'을 출간하고, 동시에 같은 제목의 유성기 음반도 내놓았다. '반달'에는 동요 '반달'을 비롯해 '설날,' '고드름,' '꼬부랑 할머니,' '꾀꼬리,' '흘으는 시내,' '소금쟁이,' '가을서곡,' '귓드람이,' '따오기' 등 10곡이 수록됐다. 윤극영은 1929년 2월 25일 이광수, 주요한 등과 함께 조선가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4년에는 서울에서 독창회도 가졌다.

1940년 서울과 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했으나 운영에 실패했다. 1941년 룽징에서 역마차 사업을 하다가 일제의 강요로 만주국 주민조직 간도성 협화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간도에서 해방을 맞아 돌아오는 길에 1946년 중국공산당 경비대에 붙잡혀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제자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1947년 톈진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중국을 탈출한 그는 월남 길에 3.8선을 넘어오다가 연천에서 또 한 번 붙잡혔지만, 무사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달'은 1950년대 초 베이징에서 조선족 김정평과 그의 아버지 김철남이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해 30년여간 사랑받다가 1979년 '소백선(小白船 하얀 쪽배)'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음악 교과서에 수록됐다.

윤극영은 400여 곡의 동요를 남겼다. 1957년 제1회 소파상을 수상했으며 1963년 서울교육대학 제정 '고마우신 선생님'에 추대됐다. 1969년 '색동회'를 부활시켜 1973년부터 1년간 제4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7년 어린이 문화단체 동심문화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1988년 11월 15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64년 세광출판사에서 간행한 '윤극영 111곡집'의 서문에 윤극영은 "오직 어린이 세계를 위해 내가 바라는 노래를 마음껏 짓겠다"라고 썼다. 그는 작사와 작곡을 병행했는데 평소에 "가락이 없는 시가 있을 수 없고 시의 리듬을 잡지 못하는 노래가 있을 수 없다. 작곡과 작사는 손의 안팎과 같은 관계"라고 말하곤 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흘러가는 쪽배처럼 암울했던 시절, 식민지 조선인들은 나라 잃은 원통함과 설움, 자신들의 시름을 '반달'에 실어 불렀다.

윤극영은 생전에 이 노래를 지을 때 가장 고심했던 대목은 2절의 마지막 구절 '샛별등대란다 길을 차저라'였다고 회고했다. '길을 잃어 아무리 막막해도 샛별이 등대처럼 빛난다, 그러니 희망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의미하는 '하얀 쪽배'는 은하수를 건너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구름나라'를 지나 민족의 독립인 '샛별등대'를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느라 유랑 생활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러면서도 조국 잃고 우리 노래까지 잃었던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동요를 만들어냈다.

젊은 시절 도쿄의 하숙집을 찾아온 방정환은 윤극영에게 "자신만을 위한 음악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윤극영은 평생토록 뜻을 함께했다.

그의 한평생은 '반달'과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반달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를 완전히 지배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지금도 즐겨 부르는 노래 '반달.' '반달'이 뜬지도 90년이 넘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 희망을 심어준 '반달 할아버지'는 영원한 등대지기로 남아있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