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복제' 매달린지 35년…한만영 작가 "존재 자체가 시간"
아트사이드갤러리서 '이매진 어크로스' 개막…신작 16점 전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청명한 하늘에 청화백자 한 점이 떠 있다.
희고 푸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자기의 생김새는 매우 사실적이다.
캔버스 위 청화백자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점과 아득한 하늘빛 바탕만큼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함께 풍긴다.
"청화백자에서 하늘에서 뽑아낸 듯한 이미지를 발견했어요. 블루라는 것에는 원초적인 것, 근본적인 것이 있지요."
10일 오후 서울 서촌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만난 한만영(61) 작가의 말은 알 듯 말 듯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우주에 그대로인 것이 하늘입니다. 하늘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잖아요?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죠. 서양에서 보나, 동양에서 보나 똑같고요.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하늘이라고 말했을 뿐, 그건 물리적인 하늘이 아니라 심상의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 '시간의 복제'(reproduction of time) 시리즈, 즉 캔버스 위 하늘빛 바탕에 다양한 기성 이미지를 그려 넣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고대 로마 신전부터 르네상스 회화, 고구려 고분벽화, 불상,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미술품 이미지를 빌려온 그의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화면이 특징이다.
그는 '시간의 복제' 작업을 두고 "(당대를) 이 시대로 불러내는 작업"이라고 칭했다. 기성 이미지가 상징하는 시간,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려진 16세기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그토록 시간성에 몰입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존재 자체가 시간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12일 개막하는 개인전 '이매진 어크로스'에서는 청화백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등 16점의 평면회화 신작들을 선보인다.
청화백자 작품은 청화백자 형상을 MDF 저부조로 만들고 표면에 문양을 그린 뒤, 이를 캔버스에 부착해 제작한 대형 작품이다.
캔버스 표면에 거울을 부착한 작품 3점도 작품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관람자를 비롯해 현재 이미지가 화면에 떠오르는 점이 흥미롭다.
국내 서양화단은 한국전쟁 이후 개념미술 위주로 전개됐고, 형상이나 구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작가는 어떠한 조류에도 속하지 않은 채 35년간 '시간의 복제' 작업에 몰두해 왔다.
작가는 외롭지 않았냐는 물음에 "외로움이 왜 없었겠느냐"고 답했다.
"지금도 미니멀 아트가 성행하는데 그때는 더 했어요. 개념미술을 하지 않으면 현대 미술 작가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모두가 미니멀 아트를 하는 상황에서 저도 그걸 한다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았어요."
작가는 가족의 타박을 들을 정도로 작업에 열중한 탓인지 한층 야윈 모습이었지만, 혼자 묵묵히 걸어온 길을 설명할 때만큼은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전시는 11월 5일까지. 문의 ☎ 02-725-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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