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종이가 아니다…가을과 함께 찾아온 종이조형展
원주 뮤지엄 산, 26명 작가의 종이 조형 소개하는 기획전 열어
삼청동선 그을린 한지로 작업하는 김민정·고서 붙이는 신혜진 전시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어둑한 전시장에서 황금색 천이 빛을 발한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에 내걸린 박혜수의 '굿바이 투 러브Ⅰ-환상의 빛'(2017)은 금색 종이학 1만 마리를 접은 뒤 다시 펼쳐 붙인 작품이다.
지난달 28일 찾은 미술관에서는 많은 여성 관람객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곱씹는 듯, 작품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그 맞은편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 기둥을 떼어온 듯한 이종건의 '노트 프롬 인 비트윈'이 백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원통 기둥이 굴러가면서 작가의 어릴 적 일기 문구가 종이 위에 찍힌다.
둘 다 종이의 본디 역할인 소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채로운 종이 조형 전시가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찾아왔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뮤지엄 산에서는 기획전 '종이가 형태가 될 때' 전을 최근 개막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나 어린이 완구 재료가 아닌, 조형 언어로서 종이를 주목한다. '공간', '소통', '사유와 물성'이라는 소주제로 26명 작가의 작품을 분류해 놓았다.
2013년부터 실연을 소재로 한 작업을 해 온 박혜수 '환상의 빛'이나 엄청난 말을 쏟아내는 듯한 현대인의 모습을 판화와 페이퍼커팅으로 표현한 이주연 '엔트로피칼' 등은 일상을 잡아챈 능력이 기발하다.
캔버스에 종이 콜라주와 아크릴 채색을 한 정영주 '스노위 랜드스케이프 812', 1987년 민주화 이후 어느 마을 풍경을 그린 임옥상 '우리동네 1988년 4월' 등에서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곳은 '사유와 물성' 공간이다.
신문에 연필과 볼펜을 반복적으로 그어 활자와 여백을 덮어버리고, 그것이 신문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한 최병소 작품은 수행에 다름없다. 이 밖에 송번수, 김인겸, 한호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린다.
'종이가 형태가 될 때' 전은 내년 3월 4일까지 열린다. 뮤지엄 산의 한솔문화재단은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강원도를 찾는 외국인 관람객들에게 우리 종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자체도 걸작이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감상하려는 발걸음도 끊이질 않는 곳이다. 문의 ☎ 033)730-9000.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는 수행과 다름없는 종이 작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두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김민정 개인전 '종이, 먹, 그을음: 그 후'는 30여 년째 한지와 먹, 불을 재료로 작업하는 작가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불에 한 장 한 장 그을린 한지 조각 수천 개를 이어붙인 '더 스트리트', 한지에 먹을 친 뒤 또 다른 그을린 한지와 겹쳐서 배접한 '페이징' 등의 작업을 두고 단색화의 미학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작가는 8월 말 간담회에서 "한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라면서 한지를 초나 향에 그을리는 일이 자신에게는 일종의 명상이라고 설명했다.
고서로 작업하는 젊은 작가의 개인전도 이 못지않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청와대 인근 공근혜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신혜진 개인전 '영혼의 소리'다.
작가는 헌책방에서 수집한 고서에서 활자 없는 부분만을 잘게 오리고 이를 이어 붙이기를 반복, 하나의 견고한 조각으로 만들어낸다. 짧게 잡아도 수개월이 걸리는 작업들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빛바래다 못해 바스러질 정도로 약해진 고서가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김민정·신혜진 작가의 전시 모두 8일 막을 내린다.
문의는 현대화랑 ☎ 02-2287-3591. 공근혜갤러리 ☎ 02-738-7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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