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평생 처음 느끼는 즐거움"…한글 공부에 푹 빠진 할머니들
논산 70∼80대 할머니 학생 1천300여명 한글교실서 늦깎이 공부
"은행·병원서 이름쓰고, 광고판·버스 행선지 읽는 재미 쏠쏠"
(논산=연합뉴스) 양영석 기자 = "이번에 한글 꼭 배워서 4년 전 하늘로 떠난 남편에게 못다 한 말을 편지로 쓰고 싶어요.", "은행에서 내 이름을 써서 돈을 찾고, 병원 진료카드를 쓸 줄도 알아, 성경책도 읽고 택배도 혼자 보낼 수 있어."
한글 공부에 푹 빠진 할머니들이 요즘 느끼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지난달 25일.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할머니 20여명이 마을회관에 모여앉아 한글 공부 책을 폈다.
방바닥에 그대로 앉아 책상다리하느라 허리가 아플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힘든 내색이 없다.
학생들 앞에선 선 이순선 선생님이 화이트 보드에 '봄이 좋다'를 쓰고선 "봄이라고 쓰고 '보미'라고 읽어요"라고 말했다.
삐뚤삐뚤하게 따라 적으며 어디선가 한숨이 흘러나오자 할머니들 얼굴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충남 논산시에서 운영하는 한글대학 한글수업에서 배움의 시기를 놓친 얼머니들이 모여 뒤늦게 한글 공부 삼매경에 빠진 모습이다.
그 옛날 우리 사회 깊이 뿌리 내린 남아선호 사상 탓에 여성은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글대학 학생 대부분은 70∼80대 할머니다.
이들 할머니가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배움에 대한 갈망'이다.
너무 늦은 건 아닌지 안타까워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어느 박사급 인재 못지 않다.
동산1리 마을회관에서 공부 중인 문순임(79)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고 싶어 2년 전 딸의 손을 잡고 인근 초등학교 문을 두드렸다가 실패했다. 그러다 지난 3월 마을 회관에서 한글학교 수업을 한다는 말에 한걸음에 달려와 등록했다.
문 할머니는 "글자를 모르니 손주들 보기 부끄럽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한글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하다"며 "조금 더 한글이 익숙해지면 4년 전 떠난 남편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 미안했던 일을 편지로 꼭 쓰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 학생들은 요즘 길을 걷다 광고판을 마주치면 흥이 절로 난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지만, 지금은 가던 길을 멈추고 광고판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를 읽은 재미가 쏠쏠하다.
지나가는 시내버스 행선지도 알 수 있어 즐겁다.
이런 즐거움에 한글수업이 있는 날이면 학생들은 농번기 밭일도 제쳐놓고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한글학교 입학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배우고 싶으면 누구나 함께 공부할 수 있다.
논산 한글학교 최고령 학생은 광석면 천동2리 한글대학에 다니는 101세 이태희 할머니다.
이태희 할머니는 며느리 소병순(67)씨와 함께 한글교실을 다닌다.
같이 한글을 배우는 즐거움에 고부간 갈등은 찾아볼 수 없다. 복습을 반복하는 시어머니 학구열을 따라잡기 위해 며느리 소병순씨가 조금 부지런해야 할 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국내 성인 문해능력 조사 결과 2014년 기준 18세 성인 가운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가 어려운 비문해 인구는 264만명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60대 이상 고령자이며, 농산어촌의 비문해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논산시의 문해교육 잠재수요자는 전체 인구의 29% 정도인 2만9천명에 이른다. 현재 한글교실 109곳에서 늦깎이 학생 1천300여명이 한글과 그림을 배우고 있다.
한글학교를 총괄하는 논산시 100세 행복과 윤선미 팀장은 "어르신들의 공부 의지와 노력은 곁에서 지켜보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다. 시화 작품은 전문가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윤 팀장은 "문해교육은 한글을 가르치칠 뿐 아니라 할머니들 마음 속에 간직한 한을 풀고 자존감을 높여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자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young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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