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전세계 아이들의 목숨을 살린 여성 이야기
세이브더칠드런 설립자 에글렌타인 젭 평전 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919년 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전단을 돌리던 40대 여성이 체포됐다. 정부 승인을 받지 않고 전단을 배포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기들을 굶겨 죽게 하는 나라, 여자들을 고문하는 나라, 노인들을 죽이는 나라?" 깡마른 아이들 사진과 함께 전단에 실린 문구였다.
여성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가 법정에서 들려준,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재판이 끝난 뒤 검찰총장은 그에게 전단 1장에 부과되는 벌금과 같은 5파운드를 기부했다. 이 상징적인 돈은 어린이들을 위한 긴급구호 단체에 제공된 첫 기부금이 됐다.
신간 '누가 이 아이들을 구할 것인가'(원제: The Woman Who Saved the Children)에 실린 '세이브더칠드런' 설립자, 에글렌타인 잽(1876~1928)의 이야기다.
에글렌타인이 전쟁 후유증 속에서 고통받고 굶주리는 어린이를 구하고자 동생 도로시와 함께 세운 세이브더칠드런은 현재 120여 개국 어린이를 돕는 세계 최대 독립기구로 성장했다.
이제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 인권의 개념을 주창한 이도 에글렌타인 업적이다. 그는 1923년 어린이의 권리와 책임을 명시한 어린이 인권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책의 저자 클레어 멀리는 영국의 전기 전문 작가이면서 그 자신도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100여 년 전 아이를 낳아본 경험도 없고 아이들을 그렇게 각별히 아끼지도 않았던 한 여성이 어떻게 수많은 아이의 삶을 구하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에글렌타인을 자신의 이상을 위해 희생하다가 겨우 쉰두 살에 미혼으로 자녀도 없이 죽은 사람으로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중략) 질질 끌리는 신발을 신고 형편없는 소설을 쓴 에글렌타인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행성에 살았던 사람이다. 나는 '업적이라는 굴레'에서 에글렌타인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세기 후반 유복한 중산층 가정의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한 여성의 길은 대체로 예측가능했다.
그러나 어린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회사업을 벌였던 어머니 등은 명석한 머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예민한 성격을 가진 에글렌타인의 삶을 남들과는 다른 인도주의적인 길로 인도했다.
에글렌타인은 법에 저항하고 동료와 지지자들의 보수적인 견해에도 반기를 들었다. 적국이라 할지라도 헐벗고 어려운 아이들이 있다면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당대 다른 여성 운동가들과 달리 모성애로 호소하지 않았던 점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책은 에글렌타인을 피 끓는 투사로 그리지 않는다. 허약했던 몸과 우울증으로 주저앉을 때가 잦았고, 시끄러운 세상을 뒤로한 채 영적인 대상에 심취하거나 소설에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을 책은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고통으로 신음했던 유럽 사회의 풍경도 생생하게 전하는 책이다.
이길태 옮김. 책앤. 368쪽. 1만8천 원.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