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 체포, 투옥'…사우디 여성 운전 허용은 시혜 아닌 쟁취
1990년부터 여성운동가 '운전면허증 투쟁'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26일(현지시간) 여성 운전을 허용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하자 사우디 여성운동가 마날 알샤리프(38)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기쁨보다 먼저 지난 20여 년의 고된 '투쟁'의 소회를 밝히는 글을 올렸다.
알샤리프는 2011년 페이스북을 통해 '우먼투드라이브'(#Women2Drive)라는 운동을 시작한 주역이다.
그는 이 글에서 "2011년 6월17일 운전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나도 감옥에 갔다"면서 "그러나 많은 여성이 그날부터 용감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그날 이후 사우디는 전과 같지 않았다"고 적었다.
사우디 정부의 역사적인 여성 운전 허용은 살만 국왕과 실세 왕세자 모하마드 빈살만의 '결단'으로 해석되지만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한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기 위해 사우디 여성들은 27년간 금기와 편견, 종교의 벽과 싸워야 했다.
운전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90년 11월6일이다. 수도 리야드의 한 쇼핑몰 주차장에 40여명의 여성이 모였고 이 중 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딴 15명이 직접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이들은 남자 보호자나 운전기사없이 약 1시간 동안 리야드 시내를 직접 운전했다.
종교 경찰에 잡힌 이들은 체포돼 하루 동안 경찰서에 구금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보수적 종교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흘 뒤 열린 금요대예배에서 성직자들은 이들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몰아붙였다. 집으로 익명의 살해 협박 편지가 오기도 했다.
이들 여성은 직장을 잃고 1년간 출국금지까지 당했다.
이후 종종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여성의 운전 허용을 논의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묵살당했다.
여성이 운전해선 안 된다는 구실은 다양했다.
그중엔 "사우디는 외딴 사막이 많아 여성이 혼자 운전하다 범죄를 당할 수 있다"는 다소 온건한 주장도 있었지만 "여성이 운전하면서 의자에 오래 앉으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든지 "여성은 지적 능력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궤변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2007년엔 여성 3천여명이 운전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당시 압둘라 국왕에 냈다. 압둘라 국왕은 여성의 지위 향상에 관심이 많았지만 운전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2008년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 선보였다.
그해 3월8일 국제여성의 날에 맞춰 와지하 알호와이데르라는 사우디 여성이 유튜브에 자신이 운전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올린 것이다.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동영상을 올리는 방법은 사우디에서 여성 운전 허용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크게 역할 했다.
2011년 6월17일 여성운동가 알샤리프가 운전 동영상을 올린 혐의로 체포돼 9일간 구금됐고 2013년 10월26일엔 무려 60여명의 여성이 사전 예고하고 운전하는 동영상을 올려 무더기로 체포됐다.
이들은 굴욕적인 반성문을 쓰고 남성 보호자의 확인을 받은 뒤 풀려났지만 '10·26 캠페인'은 여성 운전의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
2014년 12월엔 여성 활동가 로우자인 알하틀로울과 언론인 메이사 알아모우디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사우디 국경을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보란 듯이 몰고 오다 잡혀 73일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했다.
사우디 왕실의 이번 조치에 대해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30대 젊은 왕세자의 진취적인 개혁 조치라는 시각부터 예멘 내전에서 무차별 공습으로 민간인을 살상한다는 국제적 비판 여론을 희석하기 위해서라는 정치적인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벽이 무너진 것은 지난 27년간 쉬지 않은 사우디 여성들의 '무모했던 계란 던지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 여성 소비자운동가 섀넌 코울터는 트위터에 "새로운 권리는 종종 시혜와 수혜의 프레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진실은 사우디 여성들이 싸워서 쟁취했다는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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