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도시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복판에 위안부 기림비 우뚝
이용수 할머니 "역사적인 날…샌프란시스코 시민 모두에 감사"
기림비 주도 한인 김한일 박사 "서울 도심에 이 기림비 가져다 놓고 싶다"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김현재 특파원 =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날러는 어찌 살라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 세인트메리스 스퀘어파크에서 역사적인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이 열렸다. 재미 행위예술가 이도희 씨가 흰 한복을 입고 맨발로 무대에 올라서 장구를 치며 '가시리'를 구성지게 열창하자 맨 앞줄에 마크 혼다 전 하원의원과 나란히 앉아 있던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0)는 치마 고름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2015년 9월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기림비 결의안이 통과된 후 일본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2년여의 모금운동과 디자인 공모, 작품 제작 등을 거쳐 미국 내 공공부지로는 8번째이자 미국 대도시 최초의 위안부 기림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 명의 한국·중국·필리핀 소녀가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서 있고, 이를 이용수 할머니가 바라다보는 형상인 이 기림비는 캘리포니아주 카멜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가 '여성 강인함의 기둥'이라는 제목으로 제작했다.
기림비 동판에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태평양 13개국 여성과 소녀 수십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이른바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또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자행된 고통의 역사가 잊힐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렵다"는 위안부 할머니의 유언도 담겨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제막식 축사에서 "역사는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라면서 "여러분들 덕분에 힘이 나서 200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갈채를 받았다.
이 기림비 건설은 당초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위안부 정의연대(CWJC)가 주도했다.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릴리안 싱·줄리 탕 두 여성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CWJC는 '난징 대학살' 이슈를 공식화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아시아 여성들이 연대할 수 있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 운동을 시작했다.
김진덕ㆍ정경식 재단의 김한일 대표(치과의사)와 김현정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등 한인사회도 적극적으로 건립 운동에 가세해 지난해 8월 벌인 모금운동을 통해 1차 기금 총 40만 달러 가운데 10만 달러를 한인들이 부담했다.
이어 30만 달러를 추가 모금할 때도 한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김한일 대표는 "5달러, 10달러, 20달러씩을 낸 한인들의 정성이 모여 모금 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목표액을 채울 수 있었다"며 "기림비 건립의 모든 공로는 북가주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현정 국장은 "2년 전 기림비 결의안이 시의회에 상정됐을 때 일본 정부의 반대 로비로 통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용수 할머니의 청문회 증언이 결정타가 돼 만장일치로 채택됐다"면서 "제막식 직전까지도 일본 정부와 시민단체 등의 끈질긴 반대 로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샌프란시스코 시의원들과 샌프란시스코 중국 총영사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한국 총영사관 등 한국 정부 측 인사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기림비 건립에 관여했다"는 일본의 억지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총영사관 측은 밝혔다.
김한일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 기림비는 역사적인 의미는 물론, 작품성도 뛰어나다"며 "이 기림비를 서울의 의미 있는 공간에 가져다 놓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광주 '나눔의 집'에 기림비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서울의 도심에 이 기림비를 설치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시나 정부, 또는 대학 등지에서 장소만 제공한다면 제작 및 설치와 관련된 제반 비용은 모두 자신이 부담하겠다고도 했다.
그는 "한일 관계 때문에 장소 확보가 쉽지 않다"면서 "그러나 두 나라가 진실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아픔과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kn020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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