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백제의 비밀' 간직한 유적들
금강 끼고 쌓은 공산성·우연히 발굴된 무령왕릉
(공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제(BC 18∼AD 660)는 한성에서 시작해 웅진, 사비로 도읍을 세 번 옮겼다. 고구려 장수왕의 위례성 침범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고, 웅진은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22대 문주왕부터 26대 성왕까지 5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25대 무령왕 때부터 왕권의 안정을 되찾고 백제의 중흥을 일궜다.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천혜의 방어벽을 갖추었다. 비단결 같은 금강(錦江)을 끼고 쌓은 공산성(公山城ㆍ사적 제12호)은 웅진 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 있던 곳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公山)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성곽의 총 길이는 2천660m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이다.
임진왜란 이후 석성으로 다시 쌓았는데 현재 토성이 400m 정도 남아 있다. 처음에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렸다가 고려 때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660년 백제 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고,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인조가 피란한 역사를 품고 있다.
성안에는 왕궁지를 비롯해 임류각과 연지, 저수시설,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만하루 등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송산리 고분군과 함께 2015년 7월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금강 끼고 쌓은 천혜의 요새
공산성에는 네 개의 문이 있는데, 공산성을 일주할 때는 푸른 숲이 우거진 언덕 위에 석축을 쌓아 올려 공산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서문의 금서루(錦西樓)를 출발지로 삼는다. 금서루는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 편찬된 '공산지' 기록에 따라 1993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로 복원됐다.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 입구에는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 47기를 모아 놓았다. 대다수는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창덕선정비"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열하듯 서 있는 송덕비 중 '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가 시선을 머물게 한다. 비문에는 1817년 공주를 가로지르는 제민천 범람으로 교량을 중수하고 제방을 다시 쌓은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백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금서루에서 남쪽 성곽길로 발길을 옮기면 황색 바탕에 백호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인다. 성 바깥쪽은 길을 낼 수 없을 만큼 가파르다. 성벽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아찔해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했다.
백제 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해 중히 여겼다.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 교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 정3품 벼슬 받은 소나무 두 그루
곡선 성곽길을 걷다 보니 성 안쪽으로 표고 85m, 너비 약 6천800㎡의 넓은 터가 나왔다. 발굴조사에서 백제 특유의 벽기둥 건물터를 비롯해 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 지하 저장시설인 목곽고(木槨庫), 축대, 토기, 기와 등 유적이 확인되었다. 연꽃무늬 수막새, 웅천(熊川), 관(官)이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 옻칠한 갑옷, 화살촉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장길수 문화관광해설사는 "건물지는 벽체가 건물의 상부구조를 지탱할 수 있게 도랑을 파고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운 것으로, 지붕에 기와를 사용한 기와집의 출현을 보여준다"며 "출토된 수막새에 연화문이 8엽, 10엽인 것은 백제 초기의 전형적인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다고 귀띔했다.
왕궁지 앞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쌍수정(雙樹亭)이 있다. 당시 인조가 이곳의 소나무에 기대어 근심에 쌓여 있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그루의 소나무에 정3품 통훈대부를 하사했는데 이후 나무가 죽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영조 때 관찰사 이수항이 정자를 세웠다.
정자 아래에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쓴 쌍수정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왕궁지에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에 닿는다. 성내로 통하는 너른 길은 조선 시대 때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이 한양에 올라가는 삼남의 관문이었고, 지금도 공주 시민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진남루는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 종군영 문루가 광복루 된 사연
여기서 가파른 성곽길을 올라서면 성안 숲 속의 임류각(臨流閣) 터가 나타난다. 백제 24대 동성왕 때의 누각 터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추정된다.
한쪽 변이 10.4m의 정방형 건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조에 "궁성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5장이었다. 또 못을 파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1993년 임류각 터의 위쪽에 2층 구조의 누각인 임류각을 복원해 놓았다.
몇 걸음 더 오르면 다른 성문과 달리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는 영동루(迎東樓)다. 백제 시대 옛 토성을 내려다보며 걷다 보면 광복루(光復樓)에 이르게 된다. 이 건물은 원래 성내에 군사가 주둔했던 중군영의 문루였던 해상루(海桑樓)를 일제 강점기에 이곳으로 옮겼고, 광복 이후 국권 회복의 뜻을 기념해 '광복루'라 고쳐 불렀다.
광복루 옆에는 임류각과 정유재란 때 공주에 주둔하였던 명나라 세 장수(이공·임제·남방위)의 업적을 기리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가 있다.
경사가 급한 성곽길의 계단을 내려서니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다. 금강과 연못 사이에 자리 잡은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금강의 경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누각으로 영조 때 건립됐다. 홍수로 붕괴돼 땅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 복원됐다.
만하루에 바짝 붙어 있는 연지는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고, 북쪽과 남쪽에서 수면에 접근할 수 있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북벽 아랫부분 동단에는 금강물이 연못으로 입수되는 수구가 40㎝의 규모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 백제인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연못 뒤편으로 성의 안과 밖을 몰래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과 임진왜란 때 승병 훈련소로 사용되었던 영은사(靈隱寺)가 있다.
'강물을 끌어당기는 누각'이란 뜻을 지닌 만하루에서 가파른 성곽길을 오르면 북문인 공북루(拱北樓)가 나온다. 북쪽으로 금강이 가로지르는 만큼 고구려의 침입을 방비하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성곽길을 따라가면 공산정(公山亭)에 닿는다. 정자에 올라 기둥에 기대서니 아름다운 금강 물줄기와 성곽길, 1933년에 놓은 금강교, 공주 신시가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붉게 물든 금강의 낙조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성 건너편 둔치에서 바라보는 공산성 야경은 마치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는 모습이다.
◇ '백제의 찬란한 문화'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은 공산성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송산(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한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돼 있다.
백제의 고분은 널무덤(토광묘)과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분), 벽돌무덤(전축분) 등이 있는데 1∼5호분은 백제의 고유 무덤인 돌방무덤이고, 무령왕릉과 6호분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다.
매표소를 거쳐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지나면 언덕을 따라 1932년 우연히 발견된 5ㆍ6호분과 무령왕릉, 1∼4호분이 이어진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ㆍ6호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됐다.
송산리 고분군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무려 108종, 4천6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왕 금제귀걸이(국보 제156호), 금제뒤꽂이(국보 제159호), 왕비 금제관장식(국보 제155호), 왕비 나무머리받침(국보 제164호), 다리작명 은제팔찌(국보 제160호), 구리거울인 청동신수문경(국보 제161호) 등 12종, 17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유물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지석(誌石ㆍ국보 제163호)이었다. 무덤 입구에 놓여 있던 왕의 지석에는 묘지와 방위도가, 왕비의 지석에는 묘지와 매지문(買地文)이 새겨져 있다.
지석의 내용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뜬 날짜와 장례 절차에 관한 것이다. 왕비의 지석에 쓰인 매지권은 땅의 신들에게 묘를 조성할 토지를 사들인다는 내용이다. 무령왕릉의 구조는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과 시신을 모신 널방으로 나뉜다.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은 널방의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5개의 보주형 등감과 창문시설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했던 송산리 고분군은 1997년부터 원형보존을 위해 영구 폐쇄됐고 무령왕릉과 5ㆍ6호분을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을 통해서만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의 산책로와 이어지는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진품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