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 편지의 매력과 멋…세상을 떠난 55인의 편지 150통
신간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요즘 편지를 받는 일은 흔치 않다.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편지보다는 이메일이 빠르고 편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등을 지낸 최정호(84) 전 울산대 석좌교수가 이런 세태를 아쉬워하며 최근 자신이 반세기 동안 받아 간직해 온 편지들을 묶어 책을 펴냈다.
그는 신간 '편지'(열화당 펴냄)에서 "서간문화의 선진국이었던 우리가 당대에 와서는 편지를 잘 쓰지도, 잘 간수하지도 않고 있다"면서 "안타까운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한 아쉬움이 이 책을 엮어내기로 한 동기"라고 말했다.
책에 수록된 편지 150통의 주인 55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이 중 가장 옛날 사람은 의학자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박사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서울대 영빈관에 머물던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 서독 유학 중이던 최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서울은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갖가지 부패가 사라지고 있다"며 "나는 박정희 장군을 존경한다"고 적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언니 바르바나 도너(1896∼1983) 여사는 이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최 교수가 보낸 조문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한국인들이 이 전 대통령을 내몰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록된 편지 중에는 학자와 언론인들의 것이 가장 많다. 철학자 박종홍과 김태길, 민중신학자 안병무, 한국일보를 만든 장기영, 리영희 교수, 이규태 조선일보 대기자 등이다.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 종사와 일본 작가 사노 요코,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 발행인, 화가 이응로와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박완서, 시인 김영태 등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눈길을 끈다.
리영희 교수의 편지에는 신동엽의 시를 처음 접하고 찾아서 만나려 했으나 이미 전해 별세했다는 소식에 크게 낙심했고 이어 김수영 시인과 알게 될 것 같았으나 차 사고로 불의에 떠나버렸다면서 "그 후부터는 '그리는' 이가 생기면 일면식 없는 분이라도 찾아가서 경의와 사랑을 표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응로 화백은 1973년 보낸 편지에서 학생들 수업에 필요한 전주제 화선지가 필요하다며 지물상에서 화선지를 사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연하장도 있다. 미술사학자 김원룡(1922∼1996) 교수는 1982년 연하장에 닭과 개 그림을 그려 보냈다. 김 교수가 임술년 개띠 생이고 최 교수가 계유년 닭띠 생임을 빗댄 '鷄鳴犬吠 一家泰安'(계명견폐 일가태안: 닭 울고 개 짖으니 한 집안이 태평 안락하다)는 문구를 곁들였다.
시인 김영태(1936∼2007)가 1979년 보낸 연하장에도 '허수아비같이 살고 있지요! 푸른 하늘 아래. 비몽사몽. 새해 복 많이! 1979 초개'라는 글과 함께 드로잉이 들어있다.
책은 편지의 원문 이미지도 함께 실었다. 엽서와 원고지, 카드 등 다양한 형태의 편지에서 육필 편지의 매력과 멋을 느낄 수 있다. 232쪽. 6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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