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

입력 2017-11-11 08:01
[연합이매진]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

노비 신세로 전락한 국모(國母)의 한 많은 인생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는 조선 6대 왕 단종(1441~1457)의 비(妃)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죽임을 당하자 조선 최고의 여인에서 노비로 신분이 강등되는 비운의 삶을 살았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는 노비 신분으로 65년 세월을 홀로 살아간 여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부른답니다. (중략) 당신과 내가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부른답니다. (중략) 문자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하더이다. 영이별 다리, 영영 이별 다리…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설움이 복받치는 낮고 초라한 다리." (김별아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 중에서)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는 영도교는 단종비 송씨가 단종을 영월로 떠나보낸 이별의 다리다. 남편과 생이별했을 때 그녀는 18세. 아직 소녀 티도 벗지 못한 나이였다. 그녀는 날마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64년을 홀로 살다 82세로 숨을 거뒀다. 목숨이 모질고도 길어서 더 애달픈 삶이었다.

단종 2년(1454년) 1월 1일 수양대군, 양녕대군, 정인지 등이 왕비 간택에 착수했다. 최종 후보 3명에 풍정창부사 송현수, 예원군수 김사우, 전사정 권완의 딸이 올랐고, 이 중 송현수의 딸이 간택됐다. 모든 것이 수양대군의 뜻이었다. 1월 25일 14세의 단종과 15세의 송씨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듬해 6월 신하들이 왕권강화를 도모하다 유배에 처하자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단종비도 대비로 물러났다. 1456년 단종 복위 사건이 벌어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대비도 대군부인으로 떨어졌다. 이듬해 6월 창덕궁을 나온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물길이 휘돌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청령포에 갇혔다. 단종비는 낙산 자락의 정업원(淨業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도교에는 이렇듯 혼인한 지 2년 만에 이별한 단종과 단종비의 애틋함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 단종비는 멀리 사라져 가는 단종을 바라보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영도교 아래로는 청계천 물길이 단종비의 눈물인 듯 동쪽을 향해 쉼 없이 흐르고 있다.





◇ 단종비 슬픔 남은 동묘와 숭인동



영도교에서 종로 방향으로 가는 길은 풍물거리시장. 종로와 잇닿은 자리에는 흔히 '동묘'라 부르는 동관왕묘(보물 제142호)가 자리한다.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인 관우의 혼을 기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 건축됐다.

풍물거리시장이 서는 곳은 옛날 '여인시장'이라 불렸다. 숭인초등학교 정문 옆 담벼락 아래에서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을 볼 수 있다. 여인시장은 동묘 남쪽 싸전골에 있던 채소시장이다. 단종비는 세조가 하사한 집과 곡식을 거부하고 시녀들이 구해오는 음식이나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아녀자들이 몰래 음식을 갖다 주곤 했지만 이것마저 금지하자 이곳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단종비가 지낼 때 채소를 던져주며 도왔다고 한다.

지하철 동묘역 옆 횡단보도를 가로지른 후 '낙산묘각사' 표지판을 보고 주택가 좁은 골목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망정과 동망봉이 있는 숭인근린공원에 닿는다. 공원은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진하게 드리우고 있다.

동망봉은 남편을 떠나보낸 단종비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올라 단종이 있던 영월 방향을 바라보고 명복을 빌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동망정은 단종비를 기리기 위해 훗날 지었다고 한다. 현재 동망봉이나 동망정에서 동쪽으로는 아파트와 상가주택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선 영조는 1771년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씨를 써서 이곳 바위에 새기게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 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망봉에서는 싹둑 자른 듯한 가파른 바위 단면이 건너다보인다. 동망봉은 현재 동네 주민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 울며 마지막 밤 보낸 우화루

동망산길을 따라 내려가다 왼쪽 보문사길로 접어들면 이내 비구니 도량인 청룡사에 닿는다. 이곳은 조선 시대 양반가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면 거처하던 곳이다. 폐위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이곳에 잠시 들러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우화루(雨花樓)에서 단종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단종비는 이곳에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화루를 지나 지하 화장실로 가는 계단 오른쪽에 난 작은 쪽문으로 들어서면 단종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정업원 터가 나온다. 정업원은 왕실가 출신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곳으로, 단종비는 이곳에서 시녀 3명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정업원 터의 조그만 비각 안에는 영조가 1771년 단종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비각은 평소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비석을 보기 어렵다. 창살 틈새로 보면 비석 정면에 '淨業院'이란 글귀만 겨우 들여다보인다. 비각 현판에는 영조가 썼다는 '前峯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전봉후암어천만년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라는 글귀가 있다.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오리 신묘년(영조 1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뜻이다.



◇ 남편 죽인 세조보다 53년 더 살아

다시 동망산길을 따라가다 명신초등학교를 지나 창신쌍용2단지 아파트 옆으로 난 샛길로 내려가면 조그만 초가인 비우당(庇雨堂)이 나온다. 조선 시대 실학자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저서 '지봉유설'을 지은 곳으로 알려졌다.

입구에 세워진 '비우당기' 표지석에는 "청백으로 이름을 떨친 유관(柳寬) 정승(이수광의 외가 5대 할아버지)이 초가삼간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이분이 나의 외가 5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고 적혀 있다.

비우당 뒤편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고 바위에 '紫芝洞泉'(자지동천)이 새겨져 있다.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종비가 시녀들과 함께 샘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저고리 옷고름이나 댕기에 자주색 물감을 들이는 일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단종비를 돕기 위해 여인시장 상인들이 옷감을 염색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비우당 옆으로는 단종의 넋을 기리는 원각사가 있다. 현재 원각사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단종비는 1521년 6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지만 남편에게 사약을 내리고 영원히 이별하게 한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덕종,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세조 자손의 죽음도 지켜봤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부인의 예로 해주 정씨 사가의 묘역에 조영(造營)하도록 했다. 숙종은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숭해 종묘 영녕전에 들였다. 이때 '어그러짐이 없고 화합하라'는 뜻에서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평생 단종을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 해서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지었다. 사릉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있다.

"나는 중이었고, 뒷방 늙은이였고, 날품팔이꾼이었고, 걸인이기까지 했으나, 어찌 되었든 한때는 만백성의 어머니인 중전이 아니었던가요" ('영영이별 영이별' 중에서)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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