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윤이상의 진정한 귀향을 기다리며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지난 7월 5일 독일 베를린 가토 공원묘지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재독 작곡가 윤이상 묘소에 참배하고 그의 고향 경남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었다. 음악을 전공한 김 여사는 "선생이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왔다가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면서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을 심었다"고 말했다. 동백(冬柏)은 통영에 많이 자생하는 식물이면서도 윤이상에게 수난을 안겨준 동백림(東伯林) 사건과 발음이 비슷해 여러 해석을 낳았다.
동백림은 베를린을 한자로 표기한 백림의 동쪽이란 뜻이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때부터 1990년 통일에 이르기까지 독일은 동서독으로 나뉘어 있었고 동독의 수도 베를린도 갈라진 상태였다. 서독 등지에 거주하던 한인 예술가, 대학교수, 유학생, 공무원 등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한 혐의가 드러났다고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발표한 것이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었다.
조선일보 서독특파원 이기양 씨가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러 1967년 4월 14일 체코에 입국했다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1961년 서독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두 차례 방북했다가 귀국한 임석진 씨는 북한에 의한 납치극임을 직감했다. 자신이 이 씨를 북한대사관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임 씨는 5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홍세표에게 부탁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방북과 유학생 등의 북한 접촉 사실을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여 수사한 뒤 34명을 기소했다. 이 가운데는 윤이상과 재불 화가 이응로도 있었다. 윤이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0년으로 감형된 뒤 1969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강제연행 등에 의한 불법적 국내 소환, 강압 수사와 무리한 기소, 고문 흔적 등으로 인해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졌고 해외 예술인과 인권단체 등의 구명운동도 이어졌다. 서독 정부는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며 개발지원계획을 철회하고 국교 단절까지 검토했다.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4살 때 통영으로 이사해 초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유학해 음악에 뜻을 세운 뒤 일본 오사카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첼로를 전공했다. 해방 후에는 통영여고와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통영 지역 초중고와 고려대·부산고·경주고 등의 교가를 작곡했다. 1956년 늦깎이로 유학길에 올라 프랑스 고등음악원을 거쳐 이듬해 베를린대에서 수학하던 중 1959년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예악', '낙양' 등 동양적 소재의 오페라를 선보여 현대음악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던 중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수감 중이던 1968년 오페라 '나비의 꿈'을 완성한 데 이어 1972년 8월 뮌헨올림픽 개막 기념으로 오페라 '심청'을 선보였다.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한 윤이상은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하는가 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그린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1981년 발표하고 민족 통일의 염원을 담은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1987년 북한에서 초연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애국지사로 칭송받은 반면 남한에서는 친북·반체제인사로 찍혔다. 1994년 예음문화재단이 주최한 윤이상음악축제에 초청받았으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며 고향 방문 기회를 포기했고 이듬해 11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세계 음악계에서 윤이상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해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에 꼽힐 만큼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민주화가 진전된 뒤에야 음악적 업적과 예술세계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고 그의 음악도 한국 관객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를 기리는 국제음악제와 그의 이름을 딴 국제콩쿠르가 창설되고 기념관 건립도 추진됐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동백림 사건의 외연과 범죄 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2006년 1월 발표했다.
하지만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윤이상의 친북 행적 논란이 재연되며 윤이상 기념사업은 뒷걸음질쳤다. "윤이상의 권유를 받고 가족과 함께 방북했다가 혼자 탈출했는데 아내 신숙자와 두 딸은 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오길남 씨의 주장을 토대로 2011년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란 이름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사진전이 열려 윤이상 규탄 목소리에 힘을 더했다.
9월 17일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다. 올해는 동백림 사건 발표 50주년이자 '심청' 초연 45주년이기도 하다. 또다시 정권이 교체된 가운데 지난달부터 통영과 서울 등지에서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 콘서트·전시·추모 행사 등이 줄을 잇고 있다. 통영시의회는 11일 본회의를 열어 2010년 윤이상 생가터에 지은 '도천테마기념관'을 '윤이상기념관'으로 개명하기로 의결했다. 이곳은 윤이상의 유품을 전시해놓고도 시비를 우려해 소재지 동명을 딴 이름을 붙였다가 제 이름을 찾았다. 통영국제음악당과 콘서트홀을 각각 윤이상음악당과 윤이상홀로 바꾸자는 시민 제안은 여론을 더 수렴해 다음에 논의하기로 했다.
김정숙 여사가 심은 윤이상 묘소의 동백나무가 독일의 춥고 습한 겨울을 나기 힘들다는 우려가 제기돼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이 전문가를 동원해 특별관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뒤늦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친북 행적 논란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하루빨리 남북 화해와 평화가 이뤄져 그의 생애도 제대로 평가받고 그의 넋도 편안히 고향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베를린에 심어진 통영 동백나무도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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