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용담검무' 장효선 명인

입력 2017-10-11 08:01
[연합이매진] '용담검무' 장효선 명인

무(武)·무(舞) 어우러진 검예도 창시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지금으로부터 156년 전, 동학의 교조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기쁨을 칼춤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훗날 이름 붙여진 용담검무(龍潭劍舞)가 그것이다. 한때 사라졌던 용담검무의 계승·발전에 앞장서온 검무가 장효선(張孝善·61) 박사는 검(劍)이라는 무(武)의 정신과 무(舞)라는 예술적 경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검예도(劍藝道)를 창시했다. 용담검무의 현대적 의미와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용담검무의 가사인 검결(劍訣)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드넓은 실내 도장에 장엄하고 경쾌하게 울렸다. 음악에 맞춰 검무 명인의 춤사위가 느린 듯 빠르게, 빠른 듯 느리게 이어졌다.

"때이로다, 때이로다, 이내 때이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이로다"

가사의 뜻처럼 지금 아니면 영원히 추어 보일 수 없기라도 하는 걸까. 지금이 바로 그 적시(適時)! 목검을 쥔 춤꾼 무인이 결기 넘치는 얼굴로 정면을 잠시 응시하나 싶더니 쪽빛 도포 자락은 어느새 제 흥에 취했는지 춤사위와 함께 허리를 빙글빙글 휘감아 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칼춤을 추며 태어났나 봅니다. 평생 해온 게 이것밖에 없어요. 칼춤은 저의 삶 그 자체입니다. 칼춤 없는 제가 없다 싶을 만큼 '칼춤'과 '나'는 일체화했다고 할까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의 용담검무 수련관에서 검무를 잠시 시연해 보인 장 박사는 칼춤이 자신에게 숙명인 듯하다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 표정에는 흡족함이 함께 실려 있었다. 사라졌던 용담검무를 되살려 현대적으로 새롭게 계승한 데 대한 자긍심도 얼굴 가득 내비쳤다.



◇ 검예도로 새롭게 계승된 용담검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이 거세게 일던 19세기 후반, 수운 최제우는 경주 용담(龍潭)에서 칼과 춤으로써 시천주(侍天主)의 진리를 폈다. 하지만 이 검무는 집권자들에게 역모죄로 받아들여졌고, 1864년 3월 수운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효수형에 처해지면서 검무 또한 음지로 자취를 감춰야 했다.

남몰래 전해지던 검무가 햇빛을 다시 보게 된 건 근래 들어서였다. 장 박사는 일곱 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검무를 보고 배운 게 자신이 검무의 세계를 접한 첫 계기였다고 들려준다.

"선소리꾼이었던 아버지는 마을의 애경사를 주로 맡아 진행하셨지요. 돌아다니시면서 춤과 노래를 하셨는데 어느 날은 저를 목말 태우시더니 작대기로 칼춤을 추어 보이시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따라 해보라며 작대기를 손에 쥐어 주셨지요. 그 작대기 칼춤이 어찌나 신나던지요! 검무를 체계적으로 몸에 익히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6년 뒤인 열세 살 때였습니다."

장 박사 집안의 칼춤 내력은 무척이나 길다. 거슬러 올라가면 수운 최제우에까지 닿는다.

"고조부는 고향인 남원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수운 선생께서 거처하신 은적암(隱寂庵)을 고쳐드린 게 인연이 돼 검무를 배우시게 됐지요. 고조부는 목검을 깎아 수운 선생께 드리고 수운 선생은 검무를 고조부께 가르쳐주신 겁니다. 이 검무가 증조부-조부-부친을 거쳐 저까지 4대에 걸쳐 이어졌어요."

어머니에게서 "네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칼춤에 깊이 매료된 장 박사는 1980년 아버지가 타계한 뒤 사명감을 갖고 검무 재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태생적으로 칼춤을 출 수밖에 없나 봅니다. 칼만 들면 저절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신명의 춤사위를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해요. 군대 가서도 장기자랑은 칼춤이었고요. 제대 후에는 칼춤을 단순한 무술에서 예술적 공연으로 탈바꿈시킨 검무극을 연출해 화제가 됐지요. 그때가 1984년인데, 무술을 무대에 올린 첫 번째 사례일 겁니다."

그해에 한빛예무단을 창단해 극단 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한 장 박사는 계백장군, 온달장군, 광개토대왕 등 역사인물들을 검무극으로 30여 년간 줄기차게 재현해왔다. 그동안의 무대공연 횟수가 1천여 회에 이른다. 서울정도 600주년을 맞은 1990년에 서울 정동극장에서 용담검무를 최초로 공연한 데 이어 2000년 용담검무 계승·복원 학술발표회 개최, 2006년 용담검무보존회 설립, 2010년 KBS 다큐멘터리 경술국치 100주년 출연 등의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장 박사는 용담검무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킨 검예도를 1987년 창안해 주목받고 있다. 강화된 한국적 수련법으로 자아를 일깨우고 인격을 완성하는 검선일치(劍禪一致)를 추구하고 있는 것. 검무의 무예성과 예술성, 건강성을 한데 모아 용천검이 꿈꾸는 무극대도를 찾기 위해서다. 장 박사는 "민족혼의 상징인 용담검무는 한국전통무예와 문화예술의 쾌거로서 우리 민족의 기운을 회복하는 데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 조선시대 들어 원형 훼손되고 입지 좁아져

그렇다면 검무의 역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장 박사는 검의 역사가 우리 민족사와 궤를 같이할 만큼 길다고 들려준다. 신화와 전설의 제의적(祭儀的)·무예적(武藝的) 기록들이 이를 방증한다고 한다.

"단군시대에 신성한 제단을 차려놓고 잡귀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검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고구려의 경우 검무 모습을 벽화로 그려 잡귀를 몰아내고 평안을 유지코자 했어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도 검무로써 그 기운을 불러내고 사람들의 뜻을 한데 모았다고 합니다."

신라의 대표적 검무가로는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이름의 화랑이 있었다. 장 박사가 그랬듯이 나이 일곱 살에 검무를 배우기 시작한 황창랑은 특히 쌍검무의 명인이었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황창랑은 적국인 백제에 들어가 칼춤 도중에 왕을 찔러 죽이는 공을 세웠다. 장 박사는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의 풍속조 등에 이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점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검무의 원형이 훼손되고 입지 또한 크게 좁아졌다는 사실. 이는 무인의 사회적 지위가 격하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주류에 합류하지 못한 무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풍물패를 따라다니며 살판의 기예를 펼쳤다는 것이다. 장 박사는 검무 왜곡의 대표적 사례로 여기검무(女妓劍舞)를 꼽았다.

장 박사는 수운 최제우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6대조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기운을 이어받아 용담검무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최 장군이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앞장섰듯이 최제우도 쇠락해가는 국가 안위를 걱정해 동학을 창도하고 용담검무를 추었으나 혹세무민(惑世誣民)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 체포돼 결국 대구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여준 수운의 결연함은 시대를 넘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취조과정에서 선전관이 검무를 추지 않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노라며 회유했지만 수운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며 죽음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전북 남원에서 수운으로부터 용담검무를 배웠던 동학인들이 춤을 추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검무는 숨어서 몰래 추는 춤으로 숨을 죽여야 했다.



◇ "검무를 추다 보면 수운 선생 기운 느껴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남원은 장 박사에게 운명과 같은 땅이다. 경주 용담정에서 태어난 수운은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道)를 구하고자 10여 년 동안 전국을 떠도는 이른바 주유팔로(周遊八路)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1860년 경주에서 무극대도의 종교체험을 한 뒤 동학을 창도하고 용담검무를 제자들과 함께 추기 시작한다. 이듬해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으로 은신한 수운은 이곳에서 비로소 동학과 용담검무를 완성하게 된다.

"용담정과 은적암을 갈 때마다 수운 선생이 사셨던 그 시절과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곤 합니다. 선생의 무극대도를 떠올리노라면 저 자신은 한없이 작아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감흥에 젖어들게 된답니다. 선생의 생각을 따르다 보면 생각 또한 같아짐을 느끼고요."

장 박사를 검무의 희열에 빠져들게 하는 최대 요소 중 하나는 수운이 은적암에서 지은 검결이다. 동학 완성 후 그 기쁨을 검으로 표현키 위해 낳은 146자의 이 결시는 시공을 초월해 뭉클한 울림과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구절마다 생사와 우주를 관통하는 교훈과 감동을 함축하고 있어서다. 지금의 느린 중머리 가락의 검결 음악은 2006년에 국악인 이생강 씨가 곡을 붙여 탄생한 것이다.

"용담검무의 기개와 구도심이 가장 감명 깊게 표현된 대목이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입니다. 동학의 큰 이치인 무극대도를 상징하는데 예리한 칼로 단숨에 적을 베는 칼을 쓰듯이 동학의 진리를 주저 없이 펴자는 의미지요. 무예와 예술이 하나로 어울리면 그 어느 명장을 만나더라도 당해낼 수 있다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디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舞將士)' 역시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대목이고요."

장 박사는 이 같은 용담검무의 정신과 기법을 저서 '달 품은 용천검 - 용담검무'와 자전소설 '무심(武心)' 등을 통해 정리하기도 했다. 용이 물속에서 승천의 때를 기다리며 기운을 모으고 있다가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라 고요한 물 위에 빛을 비추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용천검의 기운으로 삶의 자유와 감흥을 만끽하자는 것이다. 장 박사는 용담검무의 근본 취지와 역할에 대해 나라님을 도와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사귀를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하는 벽사진경(僻邪進慶),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한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로 압축해 설명했다.

용담검무가 살생이 결코 아닌 상생을 지향하고 물질이 아닌 정신을 추구함은 검과 복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검(眞劍)이나 무구형(巫具形) 칼이 아닌 목검(木劍)을 쓰는 건 인간생명을 귀히 여기는 동학사상의 발로라고 장 박사는 설명한다. 칼이라는 무기로 검무를 펼쳐도 결투나 전쟁이 아닌 생명과 기예의 의지가 담긴 목검을 사용한다는 것. 오행(五行)으로 볼 때 나무인 '목(木)'은 동방의 '동(東)'을 뜻하고 쇠인 '금(金)'은 서방의 '서(西)'를 의미한다.

"복식이 시사하는 바도 커요. 무인의 복식이 아닌 유학자의 복식을 하고 춤을 추는 거지요. 양반가의 신분이었던 수운 선생은 미색의 저고리 바지에 옥색 도포와 아청색 쾌자를 입고 정자관, 술띠, 버선, 태사혜 차림으로 검결을 부르며 춤을 춤으로써 내면의 기운을 한껏 북돋우고자 한 것입니다. 용담검무를 검선일치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도포 차림만 해도 160여 년 전의 수운의 생각을 절로 느껴볼 수 있답니다."

용담검무가 자신의 영혼이자 살아가는 이유라고 역설하는 장 박사는 검예도의 세계화와 미래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지금의 검무 인원은 모두 1천여 명. 올해 들어 남원, 정읍, 서울 등 곳곳에 수련원을 개원하고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 외국 활동폭도 해마다 넓히고 있다.

장 박사는 현재 한빛예무단 대표, 한국검예도협회 총재, 세계검예도연맹 총재, 용담검무보존회 회장, 세계태극기공연맹 총재 등을 맡고 있다. 자신이 수학한 명지대에서 사회교육원 지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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