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명작을 14만원에?…'한여름 밤의 자선 경매' 도전기

입력 2017-08-27 08:30
수정 2017-08-27 10:24
장욱진 명작을 14만원에?…'한여름 밤의 자선 경매' 도전기

K옥션서 오프셋 판화 '가로수' 낙찰…김환기·장욱진·오치균 5점 출품

끝날 듯 안 끝나는 레이스에 '진땀'…"땅!" 낙찰봉 소리에 안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11만 원, 한 번 더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176번 11만 원." "12만 원. 하셨네요. 127번 12만 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Go)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현장에서 두 숙녀분이 경합하고 계십니다." 경매사의 이야기에 따라 웃었지만,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나란히 앉은 1m 거리의 경쟁자를 미처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

23일 저녁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K옥션 사옥을 찾았다. 2005년 설립된 K옥션은 서울옥션과 함께 미술품 경매시장을 양분하는 회사다.

이들 회사는 1년에 각각 4~5차례 메이저 경매를 연다.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종종 놀라게 하는 '김환기 65억5천만 원 최고가' 같은 기록은 이러한 본 경매에서 탄생한다.

경매 직전에는 출품작을 미리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프리뷰 전시가 열린다. 30일 하반기 첫 경매를 앞둔 K옥션은 이번 프리뷰 기간에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누구든 경매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한여름 밤의 자선 경매'다.





미술을 담당한 지 반년이 다 돼가도록, 경매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취재 현장을 챙기기도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억' 소리 나는 현장이 주는 부담감이 컸다. 그러다가도 경매 결과를 기사로 전할 때는 경매 과정 자체를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부담 없는 가격에 초보 애호가도 경매를 체험할 수 있다는 K옥션의 설명이 흥미를 일으켰다.

23일 그 날이 왔다. 이날 행사는 본 경매와 마찬가지로 손이천 경매사가 진행했다. 그는 2015년 MBC TV 예능 '무한도전'에도 등장해 주목받았던 베테랑이다.

경매에 앞서 K옥션에서는 참여 의사가 있는 이들에게 패들(paddle)을 나눠줬다.

패들은 숫자가 적힌 종이로, 호가에 따라 이를 들어 구매 의사를 알리면 된다.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직원에게 알려주고, '176'이 적힌 패들을 받았다. "패들을 받아도 꼭 (응찰)해야 하는 건 아니죠?" 기자처럼 '초심자'가 분명한 듯한 젊은 남녀는 그제야 조심스레 패들을 건네받았다.

"경매에 몰입한 나머지 패들이 경매사가 아닌, 본인 쪽으로 향하게 드는 사람들도 있다"는 손 경매사의 설명에 30여명의 참석자가 깔깔댔다. 하지만 남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정가(위탁자가 정한 최저한도 가격), 응찰 방식, 구매수수료 등 경매의 세계를 소개하는 약식 강의가 이어진 다음에 경매가 시작됐다.

이날 나온 작품은 김환기 '사슴'(1958)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6), 장욱진 '가로수'(1978) '황톳길'(1989), 오치균 '감' 등 5점.

이들은 행사를 위해 K옥션이 특별히 준비한 오프셋 석판화로, 원작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오프셋 인쇄한 것이다.

사실상 인쇄물에 가까운 오프셋 작품을 두고 판화라고 칭해서는 안 된다거나 복제물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천문학적인 액수의 원작을 소장할 수 없는 일반인이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옹호론도 있다.

평소 온라인 경매에서 20만 원, 50만 원(오치균 작품)에 시작하는 이들 작품은 이날 5만 원에서 출발했다.



"자, 준비되셨죠? 첫 번째 작품은 김환기 '사슴'입니다!" 손 경매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어수선했던 현장에 긴장감이 나돌았다. 자세를 고쳐앉거나, 몸을 앞으로 빼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슴'은 김환기 화백이 홍익대 교수 시절, 평론가 이경성의 연구실이 허전해 보인다며 슬며시 걸어주고 갔다는 사연이 있는 유화다.

오프셋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취재만 할까도 생각했지만, 김환기라는 이름과 집을 환하게 밝혀줄 소품으로는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경매 참여 욕구를 자극했다. '사슴'은 막판에 패들을 들어 올린 남성의 품에 안겼다. 낙찰가는 18만 원.

'사슴'을 내어주고 나니, 다음 작품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를 꼭 갖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작품을 두고 다른 고객과 경쟁을 벌이던 끝에 호가가 16만 원까지 치솟았다. 고민하던 찰나, "이게 현장에서 20만 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작품"이라는 손 경매사 설명에 패들을 내려놓았다.

세 번째로 나온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장욱진의 '가로수'였다.

가로수 사이를 세 가족이 걷고 있고, 가로수 위에는 앙증맞은 집과 정자들이 서 있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밀쳐 놓아도, 그 소박한 세계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가로수' 경쟁에도 여러 사람이 뛰어들었다. 가격대가 낮은 자선 경매라 부담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끝날 듯 안 끝나는 레이스에 진땀이 났다. 14만 원 호가에 고민하다, 다시 패들을 들었다. "땅!" 낙찰봉 소리가 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작품인 장욱진의 '황톳길'은 11만 원에 낙찰됐다. 마지막 작품은 손가락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유명한 오치균 '감'이었다. 순식간에 곳곳에서 패들이 무더기로 올라온 끝에 낙찰가는 37만 원.

경매가 끝나고 신용카드 결제가 끝난 뒤, 포장지로 쌓인 '가로수' 액자를 품에 안았다. 평소 경매에서는 낙찰가를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별도의 수수료 16.5%는 카드로 지불할 수 있다.

K옥션은 자선 경매라는 점을 고려해 이날은 특별히 낙찰가를 카드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하고 수수료도 면제했다.

이날 경매를 지켜본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사슴'을 낙찰받은 39살 남성은 "경매는 오늘이 처음인데 재미있었다"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잠원동의 양복점에 그림을 걸어두겠다고 밝혔다.

경매는 어떤 작가가 인기가 있는지 미술 시장의 유행과 흐름을 알 수 있는 현장이다.

미술품 구매에 관심이 생긴 이들이라면 부담 없는 가격대의 작품을 주로 소개하는 온라인 경매의 문부터 두드리는 것이 좋다. K옥션과 서울옥션 애플리케이션은 경매 관련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유용한 창구다.

이날 '가로수' 응찰에 참여했다가 결국 포기한 양서연(34) 씨도 초보 애호가다.

의학 계통에서 일하는 그는 "올해 초부터 미술품 경매에 관심을 두게 돼 책도 여러 권 읽었다"면서 "평소 K옥션 앱을 자주 들여다보는데 모의경매 소식도 그 덕분에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30일 열리는 K옥션 경매에는 총 203점, 130억 원어치의 작품이 출품된다.

김환기, 천경자, 박수근, 이중섭 등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조선 시대 책가도 대가로 꼽히는 송석 이응록(1808~?)의 흔치 않은 녹청색 책가도 등 고미술품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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