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北침투부대 '실미도 공작원' 유해 46년만에 영면

입력 2017-08-23 08:43
수정 2017-08-23 14:13
비운의 北침투부대 '실미도 공작원' 유해 46년만에 영면

국방부·유가족 안치 방식 합의…20명 유해·2명 위패 안치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1970년대 북한 침투작전 훈련을 받던 중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군·경과 교전을 벌여 숨진 비운의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유해가 46년 만에 영면에 든다.

국방부는 23일 "경기도 벽제에 신축한 군 제7지구 봉안소에서 오늘 오전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군 장례 절차에 따라 엄숙히 거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봉안식으로 국방부가 발굴한 실미도 공작원 20명의 유해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4명 중 2명의 위패가 봉안소에 안치된다. 이날은 실미도 공작원들의 추모 기일이다.

실미도 부대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4월 1일 공군 예하에 창설된 부대로, 영종도와 가까운 섬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작전 훈련을 받았다.

군은 같은 해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서울로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에 대응해 실미도 부대를 창설했다.

실미도 부대 공작원은 북한 무장공비 수와 같은 31명이었다. 이 가운데 7명은 훈련 중 숨졌고 24명은 가혹한 훈련과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1971년 8월 23일 집단행동을 감행했다.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무장한 채 부대를 탈출한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대방동까지 온 이들은 군·경과 대치하며 교전을 벌인 끝에 20명이 숨졌다. 교전으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사망했다.

살아남은 실미도 부대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처형됐다.

교전 중 숨진 공작원 20명의 유해는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상태로 잊혔으나 2004년 영화 '실미도' 개봉으로 사건이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사건 조사와 함께 이들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나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유해의 안치 방식 등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유가족이 이견을 빚어 약 12년 동안 유해를 안치하지 못했다.

국방부는 오랜 협의 끝에 유가족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고 지난 2월 합동봉안식 일정에 합의했다. 유가족 요구대로 실미도 부대 공작원을 위한 별도의 안치소가 마련돼 사건 소개문과 유품 등이 진열됐다.

처형된 실미도 공작원 4명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이들 가운데 2명은 유가족 동의에 따라 위패를 봉안소에 안치하게 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사형 집행으로 숨진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 발굴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며 "관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국방부로 제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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