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배롱나무꽃 사이로 펼쳐진 담양의 무릉도원

입력 2017-09-14 08:01
[연합이매진] 배롱나무꽃 사이로 펼쳐진 담양의 무릉도원

(담양=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만개한 배롱나무의 붉은 꽃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한여름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폭죽처럼 터지고, 아름드리 배롱나무 아래로 붉은 꽃잎들이 발걸음을 붙잡으면 그야말로 선경(仙境)을 연출한다. 거기에 세상사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정자와 연못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당나라 시선(詩仙) 이태백이 자연에 취해 읊은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자 전원시인 도연명이 말한 이상 세계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다.





배롱나무는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리를 피워가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이고, 세 번을 피었다 지면 벼가 익는다고 해서 '쌀밥나무'라고 한다. 매끈한 줄기를 긁으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흔들려서 '간지럼나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는 고려 시대 중국에서 넘어온 목(木)백일홍으로 수백 년 사는 백일홍이고, 남미 멕시코에서 넘어온 꽃백일홍은 한해살이풀이다. 사람들이 '백일홍 나무'라고 웅얼거리다 보니, 어느샌가 소리 나는 대로 '배롱나무'로 굳어졌다.





◇ 붉은 꽃이 정신을 쏙 빼놓는 명옥헌



소쇄원과 함께 조선 시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손꼽히는 명옥헌 원림(鳴玉軒 苑林ㆍ명승 제58호)은 언제 가도 좋은 명승이지만, 배롱나무의 농염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여름이 최고의 절경이다. 주차장에서 후산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서면 배롱나무의 붉은 꽃밭이 시선을 압도한다. 100여 년 이상의 노거수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토해내 주변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땅에 뚝뚝 떨어진 붉은 꽃은 마치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다.

명옥헌 원림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오희도(吳希道ㆍ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넷째 아들 오이정이 정자 앞뒤로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를 담은 연못을 파고 주위에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심었다. 서쪽 계곡에서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지었다. 정원을 '園林'으로 쓰지 않고 '苑林'으로 표현한 것은 바깥 공간과 구분 짓는 담장이 없기 때문이다. 박민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명옥헌은 정자의 이름, 원림은 정자에 딸린 정원을 뜻하는데 명옥헌도 소쇄원과 같이 주변의 자연경관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형태의 정원양식"이라고 말한다. 꽃밭에 파묻힌 정자에 올라 마루에 앉으면 배롱나무의 붉은 꽃 향연이 마치 신선이 노닐던 무릉도원을 연상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이곳의 연못도 궁궐 정원이나 별서정원(別墅庭園)에서 볼 수 있는 방지원도(方池圓島) 형이다. 연못은 네모지게 팠고 그 가운데엔 둥근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는 예로부터 내려온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우주 만물의 존재와 운행의 원리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연못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아름드리 배롱나무와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의 붉은 꽃의 조화는 명옥헌 풍경의 절정이다.

담장 하나 두르지 않은 대신 주변의 자연을 병풍 삼은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다. 사방이 마루이고, 가운데 방을 들이고, 사면으로 돌아가며 난간을 설치했다. '三顧'(삼고)라는 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인조 임금이 왕이 되기 전인 능양군 시절, 반정의 뜻을 모으기 위해 이곳의 오희도를 세 번이나 찾아온 것을 기리는 뜻으로 쓴 것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마치 꽃불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정자의 뒤뜰 연못 옆 계류 바위벽에 우암 송시열이 쓴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산에서 내려온 계곡 물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명징하다.



명옥헌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으로 꼽히는 소쇄원(瀟灑園ㆍ명승 제40호)이다. 소쇄원은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공의 미를 더한 우리나라 전통 원림으로, 별서란 본래 살림집과 멀지 않은 곳에 지은 별채를 뜻한다.

소쇄옹 양산보(梁山甫ㆍ1503∼1557)는 장한봉 계류가 흐르는 계곡에 담을 둘러치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과 '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광풍각(光風閣)을 짓고, 화계(花階)를 조성했다. 특히 담장 겸 수로인 오곡문(五谷門)은 계곡의 물길을 그대로 두기 위해 구멍을 내고 장대석 같은 자연석으로 담 밑을 받치고 있다. 10월 말까지 복원공사로 인해 입구 대숲에서 '待鳳臺'(대붕대)라는 편액이 걸린 초정과 오곡문까지만 관람할 수 있다.



◇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 식영정

소쇄원을 빠져나와 담양읍으로 길을 잡으면 차로 3분 만에 가사문학의 산실인 식영정(息影亭)에 닿는다. 무등산과 광주호가 보이는 성산 자락 끝에 올라앉아 있는 식영정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만큼이나 운치가 넘친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정자 주변에는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천년송, 수백 년 된 배롱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다.

서하당 김성원(金成遠ㆍ1525∼1597)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었다. 정자 마루 위 벽에는 임억령의 '식영정기'(息影亭記), 김성원의 식영정 한시 편액이 붙어 있다.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리던 정철·임억령·고경명·김성원은 성산(星山)의 경치 좋은 곳 스무 군데를 골라 각각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는데, 훗날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과 시인 묵객 김성원의 풍류를 노래한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됐다. 식영정 경내에는 근래 복원된 서하당과 부용당이 자리한다.



◇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산실, 송강정

식영정에서 10㎞ 떨어진 송강정(松江亭)은 송강 정철(鄭澈ㆍ1536∼1593)이 선조 17년(1584) 지었던 터에 영조 46년(1770)에 후손이 다시 세운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3칸, 가운데 방이 있는 정자의 정면에 '松江亭'(송강정)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竹綠亭'(죽녹정)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자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고, 옆 뜰에는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 시비(詩碑)가 서 있다. 정자 인근의 들판이 '죽녹'이었고 들판을 흐르는 강이 '죽녹천'이었다. 현재 증암천으로 불리고 있는 죽녹천은 '송강'이라고도 불렸다. 송강은 여기서 식영정을 오가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정자 툇마루에 걸터앉아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미인곡'을 쓰며 은거 생활을 했던 송강의 삶을 반추해본다.



◇ 자연 속에서 풍류 즐기던 면앙정

면앙정(전남도 기념물 제6호)으로 발길을 옮긴다. 송강정에서 5㎞ 떨어진 면앙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송순(宋純ㆍ1493∼1583)이 세운 정자로 '면앙정가'의 산실이자 후학들을 길러내던 곳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제월봉의 언덕배기에 면앙정이 앉아 있다. 발아래 넓은 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는 강이 흐르고, 더 멀리에는 삼인산ㆍ병풍산ㆍ추월산 등 수려한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곳에서 면앙정가와 면앙정에서 바라본 경관 30가지를 시제로 한 면앙정 30영 시가 탄생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추녀 끝을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팔작지붕 처마와 활주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하다. 가운데에 방이 있고 사방은 우물마루로 개방돼 있다.

정자 안에는 이황, 김인후, 임제, 임억령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정자를 지은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면앙정 삼언가(三言歌)'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네"

송순이 87세 때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回榜)잔치가 열렸는데 잔치가 끝난 뒤 정철, 임제, 고경명 등 제자들이 스승을 손가마에 태우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송순이 타계한 200년 뒤 정조대왕이 전라도 과거시험 제목으로 '하여(荷輿) 면앙정'(면앙정에서 가마를 매었던 일)이라는 구절을 내려 이 일을 기념하기도 했다.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정신이 서려 있는 정자의 마루에 걸터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니 시 한 수를 읊어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바람은 머릿속까지 맑아지게 하고 매미 소리는 번잡한 잡념을 말끔히 씻어준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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