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5년] 중국 최대 교민촌 음식점 상가 간판이 바뀐 이유
사드 사태 이후 중국 교민사회 최대 위기…"질적 성장이 필요한 때"
수십년째 고립·침체한 국내 차이나타운…"변화와 활성화 모색해야"
(베이징·전국종합=연합뉴스) 중국에서 한국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베이징 왕징(望京).
이곳 한인타운의 대표 음식점 상가인 '한국성(韓國城)'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태 이후 간판을 '미식가(美食街)'로 바꿨다.
대대적인 반한 감정이 불자 한국적인 색채를 없앤 간판으로 교체한 것이다.
'한국 속 작은 중국'이라 불리는 인천과 부산의 차이나타운은 점차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경색된 한중관계 탓도 크지만 중국 음식 위주의 콘텐츠 외에는 볼거리·즐길 거리가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차이나타운에 규제만 해왔던 과거와 달리 한중수교 25년을 맞는 시점에서는 화교나 중국인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중국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쇠퇴를 거듭한 중국의 한인사회 역시 재도약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한류 호황이 '사드'에 휘청…한인사회 질적 성장 필요
주중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중국에서 6개월 이상 체류한 한국 교민은 30여 만명 수준이다.
수도인 베이징과 톈진(天津)에 9만5천명, 상하이(上海)와 화둥(花東) 지역에 6만여 명, 칭다오(靑島)와 산둥 지역에 6만5천명의 교민이 몰려 있다.
특히 1만여 명의 한국 교민이 모여 살며 상전벽해 수준의 인프라가 구축된 베이징 왕징은 '중국 속 한국'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이징 외곽의 농촌이었던 왕징은 1만여 명의 교민과 주재원이 살면서 한인 슈퍼, 교회, 미용실, 시장이 많이 생겼다.
왕징에서는 한국보다 더 빨리 족발이나 '치맥'을 먹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왕징 싼취(三區)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모 사장은 "왕징은 불과 15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에 시골이었다"면서 "한국인들이 모여 살면서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서 살기 편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중국인이 몰렸다"고 말했다.
한류가 불면서 왕징 교민의 사업은 번창했지만 2010년을 기점으로 사업 경쟁력 저하와 인건비 상승으로 한국 기업이 현지 기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사드 갈등으로 왕징을 비롯한 중국 교민사회는 급격히 위축됐다.
한국 상품과 음식점 불매운동,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퍼지면서 수많은 한국 식당이 문을 닫거나 간판을 바꿔 달아야 했다.
중소기업과 주재원이 철수한 아파트나 주택은 중국 중산층, 외국계 기업에 취업한 중국 젊은이가 속속 차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왕징뿐만 아니라 교민이 많은 중국 지역 대부분에서 벌어진다.
한중수교 직후인 1993년에 베이징에서 음식사업을 시작한 최충광 씨는 "2000년대 한류 붐 조성으로 한국 음식점·물건에 대한 인기가 좋았다"며 "하지만 중국이 발전을 거듭하며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졌고 사드 사태 이후 최악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점을 그만두고 애완견 인공지능(AI) 돌봄 서비스 사업으로 전환한 최 씨는 "이제 교민들도 중국인이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적·창의적인 사업을 모색해 질적인 성장을 해야 할 시기"라고 덧붙였다.
◇ '중국집' 밖에 없는 한국 차이나타운…돌파구 시급
"왜 차이나타운에 중국집밖에 없느냐고요? 음식점밖에 못 하게 했잖아요. 지금은 나아졌지만, 건물이나 땅도 못 사게 했어요. 화교를 경계했던 거죠. 자장면만 팔아서 먹고살라는 말이었어요."
부산 동구 초량동 차이나타운에서 20년째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왕모(58)씨는 차이나타운이 음식점 위주의 획일적인 공간이라는 지적에 대뜸 이렇게 말했다.
1884년 중국 영사관이 있었던 초량동 화교 상가에 현재 20여 곳의 중국 음식점과 식품점이 영업 중이다.
부산 동구는 2007년부터 차이나타운을 특구로 지정해 거리를 중국풍으로 리모델링하고 야간경관 조명, 전통놀이·한복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한중우호센터 등을 설치했다.
하지만 부산 차이나타운은 매년 10월 축제 때를 제외하곤 관광객을 끌어들일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차이나타운 바로 인근에 러시아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정체성이 애매한 국적 불명의 거리가 돼 버렸다.
인천시 중구 북성동에 조성된 차이나타운은 부산 차이나타운보다 상황이 낫지만 관광객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선 자장면 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중국어 마을은 외국인 방문객의 인기 코스지만 사드 사태 여파로 지난해 인천 차이나타운 외국인 방문객은 2015년 1만8천311명의 절반 수준인 9천862명에 그쳤다.
한중관계가 회복되더라도 지자체가 조성한 특색 없는 건물과 중국 음식점 위주 차이나타운의 변화와 활성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은 "관 주도로 만든 박물관 등 관련 시설은 역사적 고증이 철저하지 못하고 콘텐츠도 빈약하다"며 "100년 넘은 화교의 삶, 그들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강준영 한국외대 중국학과 교수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화교들은 기업인으로 성장할 기회가 없었다"며 "대만 국적 화교 중심의 차이나타운 거주자는 물론 중국 수교 이후 중국서 건너온 '신(新) 화교'에게 투자와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가리봉동, 수원역 등 지역 곳곳에 중소 화교 촌과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지만 한국인·한국사회와 잘 어울리지 못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사례도 많다.
이 때문에 지자체가 화교나 한국 국적 취득자를 상대로 다양한 맞춤형 교육·직업·취업 프로그램으로 한국사회에 연착륙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 중국인 유학생은 '돈'·화교는 '이주노동자'…왜곡된 시선 거둬야
지난 6월 말 기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등록된 외국인 113만9천여 명 중 중국인은 한국계 중국인(조선족·31만8천662명) 다음으로 많은 20만8천107명이었다.
이 중 10% 정도인 2만∼3만명의 석사 학위 과정 중국인 유학생은 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국내 여러 대학에서 입학생이 줄다 보니 무분별하게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가 가장 많은 중국인 유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많다.
대학은 등록금만 받은 뒤 중국인 유학생을 방치하고 학사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있다.
중국인 유학생은 기초적인 한국어 수업도 듣지 못한 채 한국 학생과 수업을 들어 수업 이해도가 떨어지거나 심하면 결석이나 학교를 이탈하는 사례까지 생긴다.
기본적인 한국어 실력을 갖춘 학생을 뽑는 등 철저한 검증을 거치고 중국인 유학생을 위한 전문 강좌를 개설, 학위를 이수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욱연 서강대 중국연구소 소장은 "중국인 유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못 받으니 '우릴 돈벌이로 생각한다, 무시한다'는 인식이 생긴다"며 "실력 있는 중국인 졸업생을 배출해 한중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은 "130년 전부터 국내에 거주한 화교들은 대를 이어 사는 경우가 많은데도 우리에겐 이주노동자라는 왜곡된 시선이 존재한다"며 "이들을 지원할 법적·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재훈 특파원·윤태현 김기훈 김지헌 최평천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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