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김정은 물러선 것 아냐…美에 공넘겨 협상여지 둔 것"
"트럼프가 北미사일 제한할 가장 좋은 기회지만 위협은 여전"
WSJ "북한이 '벼량 끝 전술' 교과서 따른 것일 뿐" 분석도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괌 포위사격을 미루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의 고강도 위협에 한 발 뒤로 물러선 게 아니냐는 분석이 일부 미 언론 보도를 통해 제기됐다.
그러나 미국의 상당수 전문가는 북한이 위협을 멈춘 게 아니라 단지 협상의 여지를 열어둔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에 이 기회를 잘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5일(현지시간) 전문가들을 인용해 "미국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는 김 위원장의 포위사격 보류 발언은 미국에 위험한 교착 상태를 풀 방법을 협상할 며칠 간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보도했다.
핵전략 전문가인 비핀 나랑 매사추세츠공대(MIT) 부교수는 "사람들이 김 위원장의 발언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며 "이것은 문자 그대로 기존의 위협을 다시 고쳐 말한 것이며, 협상과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보상 또는 대가로 주는 것)의 여지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애덤 마운트 미국진보센터 선임연구원도 "북한에서 '미국이 미사일 시험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군축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한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마운트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반응할 명백한 기회를 남겨놓은 것으로 우리는 긴장 축소를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괌 주변 미사일 타격을 감수할 것인지의 선택에 직면했다"며 "그들이 한 두 발자국 물러선 것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제임스 액튼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 상공 위로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는 북한과의 국경에서 일정 거리 안에서 비행하지 않는 식의 합의가 이뤄질 수도 있다"며 구체적인 협상안까지 제시했다.
만약 협상의 기회가 닫히면 북한이 미 전략폭격기 B-1B 랜서의 출격이나 대규모 한미 연합군사훈련 등을 계기로 도발을 재개할 것이라는 염려도 크다.
나랑 부교수는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김정은)가 협박을 테이블에서 완전히 치운 것 같지는 않다"면서 "그가 도발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미국이 한다면 (괌 포위사격) 계획을 다시 검토해서 실행할 태세를 갖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괌 포위사격 보류를 언급한 김 위원장의 전날 발언 내용이 B-1B 랜서의 한반도 출격 때마다 나왔던 평양의 반응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나랑 부교수는 "그들은 항상 (괌에 주둔한) B1 폭격기를 '괌의 해적'이라고 부른다"면서 "김정은은 B1 폭격기의 출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미국이 우리 영토 몇십 ㎞ 안에 접근해서 괴롭힌다면, 우리도 화성-12 중거리미사일을 괌에서 30∼40㎞에 떨어뜨릴 것'이라고 상응하는 조치를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도 전문가 분석을 인용한 보도에서 "평양은 김 위원장의 결정이 B-1B 폭격기의 한국 상공 비행에 달려있다는 점을 시사했다"며 "만약 워싱턴이 B-1B 비행을 멈춘다면 김정은은 승리를 선언할 수 있고, B-1B 출격을 명령한다면 평양이 미사일 발사를 실행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오는 21일부터 시작되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합동군사연습이 북한 미사일 발사의 도화선이 될지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 견해가 다소 엇갈린다.
마운트 선임연구원은 "(김 위원장) 성명의 어디에서도 미국이 훈련을 취소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북한은 항상 그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AP는 북한이 더 압박을 받거나 UFG가 예정대로 치러지면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또한, 북한으로서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치 국면을 좀 더 장기적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제프리 루이스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비확산연구센터 연구원은 AP에 "그들은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잃기를 기대하면서 이 상황을 길게 끌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며 "공허한 위협은 아니지만 거액의 판 돈이 걸린 도박을 하는 셈이다. 만약 '말폭탄'이 톤다운된다면 북한은 (도발을) 건너뛸 것"이라고 관측했다.
북미 관계를 일촉즉발의 위기로까지 몰고 간 이번 사태는 그러나 북한의 주특기인 '벼랑 끝 전술'의 재연에 다름 아니다는 분석도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북한이 긴장을 누그러뜨린 정확한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중국이 지난 14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근거해 북한산 석탄, 철, 수산물 등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봤다.
WSJ는 또 2년전인 2015년 8월에도 북한의 지뢰도발과 남한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군사 대치 상황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해결된 사례 등을 들어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다시 낮추는 데 전문가인 북한이 이번에도 '벼량 끝 전술' 교과서를 그대로 따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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