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日 우익의 광기…일제군복에 전범기 나부낀 광복절 야스쿠니
'전쟁 가능한 국가' 개헌 요구 목소리도…일상 속에 파고든 日 극우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이 '종전 기념일'인 15일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이곳은 강한 제국주의 과거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강한 일본을 꿈꾸는 우익들의 해방구였다.
우익들의 광기(狂氣)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구단시타(九段下)에서 부터 시작됐다. 여기서 신사까지의 거리는 300m 가량. 검은 양복차림의 젊은 참배객들이 군부대처럼 줄을 지어 걸었고 전범기인 욱일기(旭日旗)와 일장기를 든 사람들은 화난 표정으로 신사를 향했다.
거리의 양쪽에선 우익 단체들이 총출동해 활동을 폈다.
우익 교과서를 만드는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회원들은 서명 운동을 벌였고, 독도와 가까운 시마네(島根)현은 "독도는 일본의 영토다. 시마네현의 땅이다. 국민 모두가 영토를 지키는 의식을 갖자"고 적힌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의 날' 홍보 유인물을 나눠줬다.
'난징(南京)학살의 진실을 추구하는 모임'은 난징학살은 일본군이 벌인 게 아니라는 거짓 주장을 폈고, 극우정당인 행복실현당은 '자학사관을 청산하고 헌법 9조를 개정하자'고 외쳤다. 전쟁 가능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 개헌하자는 것이다.
'자위대 여러분 항상 고맙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한 무리는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첫 보도한 아사히신문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광경도 목격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영향 탓인지 개헌 요구가 빗발쳤다.
'지금이 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영어 팸플릿이 배포됐고, 한 남성은 "미국이 만든 지금의 일본 헌법을 무효로 하자"고 목청을 높였다.
야스쿠니 신사의 영내에 들어가자 곳곳에서 일제시대 일본 군복을 입고 칼까지 찬 노인들 모습이 보였다. 70여 년 전을 재연한 그 자체만으로도 섬뜩했지만, 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는 '평범해 보이는' 일본인들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신사 내에서 어린 딸을 목에 태운 아버지의 모습이 목격됐다. 공원에 놀러 온 여느 일본인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지만 그의 팔에는 일장기가 붙었고, 등에는 '일본인이여, 야마토(大和) 민족의 후손으로 가슴을 펴라'는 문구가 쓰인 옷을 입었다. 한눈에 우익임을 알 수 있었다. 일본 우익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이날 오전 9시께 야스쿠니 참배를 하려고 200~300명이 줄을 섰다.
기자가 이날 만난 참배객 중에선 "한국인이 여기 왜 왔느냐"며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은 "일본을 지킨 분들에게 기도하러 왔다"고 말하면서도,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은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기자의 말에 '딱히 그런 생각 한적 없다"며 자리를 떴다. 불쾌한 표정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온 40대 남성은 "일본을 위해 싸워온 선조들을 뵈러 왔다"면서, "야스쿠니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다"고 쏘아붙였다.
야스쿠니 신사 내에서 기자가 만난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말투의 '보통' 수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반성하는 역사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평화를 외치면서 "한일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공허한 얘기만 했다.
"내가 5살 때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가 합사됐다"는 77세 여성은 "일찍 아버지가 전사해 힘든 삶을 살았다"면서도, "신사에 합사된 사람들에 대해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고마운 분들"이라고 경외심을 표시했다.
한국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는 한국 내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움직임을 거론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한 것이냐. 불쌍해 보인다. 한국과 일본, 사이좋게 지내자. 기자들이 좋은 기사를 써달라"고 했다.
히로시마에서 온 60대 중반의 남성은 "신사 참배를 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며 참배를 권하기도 했다.
그는 '전쟁에 끌려가 원치 않게 여기 합사된 한국인도 많다'는 기자의 말에 "전쟁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딴소리를 하면서,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 얘기로 화제를 이끌었다.
전쟁의 가해 사실은 숨기고 피해 사실만 강조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이날 야스쿠니신사에는 이른 아침부터 정치인들의 참배가 잇따랐다. 그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쏟아지자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246만6천여명이 합사됐다. 근대 일본이 일으킨 크고 작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의 영령을 떠받드는 시설이다.
12일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는 한일 시민단체들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아버지가 합사된 유족 동정남씨의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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