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방치된 일제 잔재…역사의 섬 제주는 더 슬프다
중요 국가 근현대 문화유산 훼손 심각…"이 정도일 줄…실망"
(서귀포=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문화재를 이처럼 허술하게 관리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광복절을 닷새 앞둔 지난 10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 흩어져 있는 일제 강점기 전쟁유적은 슬픈 역사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적이 뜸한 농로 곳곳에 있는 넓적한 아치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해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다.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자살결사대) 전투기를 보호하고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전쟁의 흔적' 20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농로의 맨 끝, 거미줄이 처진 채 방치된 격납고 앞에는 녹슨 표지판 하나가 이곳이 과거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를 말해주는 근현대 문화유산인 국가 등록문화재 39호(남제주 비행기 격납고)임을 알렸다.
50여m 떨어진 다른 격납고 안에는 감귤 컨테이너와 철근, 호스, 마대, 페트병 등 농기구와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문화재인지 창고인지 쓰레기장인지 구별을 어렵게 했다.
인근 다른 격납고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쓰레기가 널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유적지를 찾은 대학생 이민호(24·서울)씨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 코스 중 하나로 소개돼 있어 찾아왔는데 관리 상태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이틀 전 내린 폭우에 농로는 중간중간 흙탕물로 가로막혀 걸어서는 지나가기조차 어려웠다.
이씨는 "날씨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비 온 뒤에도 탐방이 가능하도록 도로포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으면 좋겠다"며 "다크 투어리즘에 모자람이 없는 유적들이지만, 탐방객을 맞이하기에는 관리 상태와 배려가 너무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인근의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등록문화재 317호)는 무성하게 자란 수풀에 가려 탐방객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표지판이 없다면 동굴진지인지 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송악산을 산책하는 도민은 "봄, 여름에는 뱀들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탐방로를 벗어나 수풀 속 동굴진지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귀띔할 정도였다.
동굴진지의 훼손은 더욱 심각하다.
송악산 아래 위치한 '해안 일제 동굴진지'(〃 313호)는 수년 전부터 송악산 응회암층이 붕괴하는 등 함몰이 진행돼 출입이 통제된 상태다.
4년 전 응회암층이 허물어지면서 송악산에 있는 15개의 동굴진지 중 4개 동굴진지 입구가 파묻혔다.
산책로 개설과 올레 10코스 이용객 증가, 주변 도로의 차량 통행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으나 행정은 출입을 통제하는 것 외에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해안 일제 동굴진지로 들어가 봤지만 출입을 가로막는 안전요원은 없었으며, '붕괴로 인한 안전상 위험이 있다'는 안내 문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동굴진지 안에는 누군가 갖다 버린 듯한 드럼통과 기름통, 긴 대나무, 쓰레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주도 내 일제 동굴진지 중 가장 큰 규모인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 308호)는 안전사고 우려 등 이유로 4년 넘게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 않다.
문화재청은 지난 4월 국내 등록문화재 696건 중 관리가 부실하고 활용도가 낮은 등록문화재 128건을 종합점검, 제주의 가마오름 일제 동굴진지와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 309호)의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며 긴급조치가 필요한 등록문화재로 분류했다.
현재까지도 제주의 동굴진지들은 지붕의 화산석이 떨어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재단법인 한국자치경제연구원 2015년 용역자료에 따르면 제주에는 일본군이 대륙침략 또는 본토 방어를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중 15곳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특히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주변은 태평양전쟁(1941∼1945년) 당시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일제의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를 최후 방어지로 요세화 한 '결(決) 7호' 작전의 대상 지역이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설치된 비행기 격납고와 지하벙커, 섯알오름 고사포 진지,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송악산 진지동굴 등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지정 등록문화재만도 10개에 이른다.
한 때 상모리 지역을 인권을 교육하는 다크 투어리즘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 공모에 선정돼 8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추진이 구체화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좌절됐다.
이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자체적으로 1억5천만원 예산을 들여 도내 역사 현장을 동부와 서부 2개 코스로 묶어 여행하는 '제주의 역사교훈 기행'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범 운영 중일 뿐이다.
이들 유적지 대부분은 제주도 소유가 아닌 개인(6곳), 국방부(4곳), 국토해양부(2곳), 산림청(1곳), 문화재청(1곳), 제주도교육청(1곳) 소유로 돼 있어서 관리·보전하는 데 있어 관계기관 간 또는 개인 소유자와의 협의 절차 등에 애를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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