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참새방앗간] 가짜를 진짜처럼 해야 연기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몇년 전 드라마에서 애틋한 모정을 멋지게 소화해낸 한 배우에게 "실제로 얼마 전 엄마가 된 게 연기에 도움이 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엄마 연기를 하는 배우들 중에는 결혼을 안 한 분도 있고, 출산을 안 한 분도 있다. 그런데 그분들도 엄마 연기를 다 잘한다"는 것이었다. 우문현답이었다.
어차피 연기는 가짜다. 진짜처럼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지, 연기가 진짜는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1987년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강수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출산 경험이 없다. 그러나 그가 30여년 전 '씨받이'에서 보여준 출산 연기는 실제 같았다는 평을 받는다.
물론, 흉내도 뭘 좀 알아야 낸다. 강수연은 '씨받이' 출연을 앞두고 출산 관련 다큐멘터리를 100여 편 봤다고 한다. 명연기 뒤에는 엄청난 노력이 자리한다. 하지만 배우가 연기를 위해 꼭 직접 경험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술 한방울 못 마셔도 술주정 연기를 할 수 있어야 배우다.
한국 감독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를 휩쓴 한 감독이 영화 촬영 도중 여배우를 폭행, 모욕하고 대본에 없던 베드신을 강요한 혐의 등으로 최근 고소당했다.
해당 감독은 "촬영 중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실연을 보이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고, 영화·여성단체들은 "배우의 감정이입을 위해 실제로 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연출이 아닌 폭력"이라고 비난했다.
촬영장에서 '사실성'에 대한 욕심이 화를 부르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액션신을 찍을 때도 좀더 실감나게 하려다 사고가 나고, 성애 장면 촬영에서도 문제가 불거진다. 분명 연기를 하자고 모였는데, '사실'과 '직접'을 요구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액션과 성애 장면은 정확하고 세세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액션신 잘못 찍었다가는 부상은 물론이고 목숨도 위험할 수 있다. 성애 장면은 잘못 촬영하면 폭력이자 범죄가 되는데, 이 경우는 정신적인 피해와 후유증도 극심하다. 세계적인 거장과 명배우가 만나 찍었다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도 여배우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도 상당히 불쾌한 후유증을 남긴다.)
'발연기' 하는 배우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지만, 연기와 실제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과욕도 '노땡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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