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수탈에 쫓겨간 일본서 피폭…귀국 후에도 수난의 연속

입력 2017-08-10 08:00
수정 2017-08-10 12:53
징용·수탈에 쫓겨간 일본서 피폭…귀국 후에도 수난의 연속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국내 생존 피해자 2천500여명 대상 '증언서' 수집

"日 식민 지배가 원폭 피해로 이어져…정부 차원 조사도 이뤄져야"

(합천=연합뉴스) 김선경 기자 = "아버지께서 노무자로 일본에 강제 동원돼 오사카, 히로시마에서 굴 파는 강제 노동을 하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탈출해 히로시마에서 기거하며 어머니와 나와 살았다고 하셨음."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으로 피폭된 류모(74) 씨가 당시 일본에 있었던 경위를 설명하며 '피폭자 증언서'에 남긴 기록의 일부다.

피폭자 증언서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지난해부터 국내에 생존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2천500여명을 대상으로 작성을 요청한 것이다.

이달 현재까지 100명 남짓한 피해자들이 직접 쓰거나, 가족에게 대필을 부탁해 작성한 증언서를 협회로 보내왔다.

증언서에는 원폭 투하 이전 수십년간 지속된 일제 수탈사 등 한 맺힌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증언서 내용을 살펴보면 강제 징용 등 타의로 일본에 넘어갔다가 피폭된 한국인은 류 씨뿐만이 아니었다.

정모(81) 씨 역시 "부모님이 징용으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게 됐다"며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경위를 설명했다.

강모(73) 씨는 "부모님께서 일제 강점기 모든 재산을 수탈 당해 살 길이 막막해 생계 유지를 위해 가시게 됐다"고 전했다.





조모(74·여) 씨는 "일본 사람들이 공출을 강제로 받아 갔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일본에 가면 돈을 모은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먼저 일본에 갔다"며 "그 뒤 전 가족이 일본으로 오라고 해서 히로시마에 가게 됐다고 부모님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생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현해탄을 건너간 일본이었지만 조 씨 대가족은 그 곳에서 피폭이라는 또 다른 참사를 겪어야만 했다.

조 씨는 "피폭 이후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피난해 짧게 살았지만 많은 식구가 거처하기 어려운데다 원폭 피해 지역이라 먹고 살기가 어려워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원폭 피해자들은 피폭 이후 귀국했지만 생활고와 건강 악화 등에 줄곧 시달렸다.

강제 징용된 친구의 권유를 받은 아버지와 일본으로 갔다가 피폭된 정수(75·여) 씨는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는 불바다가 돼 생활 터전을 잃은 상태였고 일본에 한국 사람이 있으면 죽인다는 유언비어까지 돌면서 급히 귀국했다고 한다"며 당시의 혼란상을 전했다.

그는 "합천으로 귀향했지만 남의 농토를 소작했고 집이 없어 남의 집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살며) 죽을 고생을 했다"며 "피폭 이후에는 호흡기 질환·심장·신장·혈압·골다공증 등 각종 병마와 날마다 싸우고 있다"고 증언했다.

아버지를 따라 나가사키에 머무르던 허모(75) 씨는 "원폭 투하로 숨진 아버지 시체를 찾아 어머니가 헤맸다"며 "남편 잃고 돈도 잃고 귀국한 뒤 모친께서 부산에서 장사하신 날들,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일, 밤중에 몽상 환자처럼 뛰쳐나간 일들이 선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피부병과 위암으로 투병 중이라며 "2세까지도 피부병이 있다. 외손자들까지 피부 문제로 걱정하고 있고, 치료 중"이라고 토로했다.



유모(77·여) 씨는 "(피폭 이후) 한국인을 쫓아낸다고 해서 부모님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며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 나물 뜯어 먹고, 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나무 뿌리를 캐서 먹기도 하며 어렵게 생활했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까지 원인 모를 두통 때문에 항상 약을 복용한다"며 "6남매 중 맏이인 딸은 태어나며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덧붙였다.

원폭 투하 전 히로시마에 있던 철공소에서 일을 하던 심모(91) 씨는 "(피폭 이후) 조선 사람은 다 죽인다는 소문이 돌아 겁이 나서 귀국했다. 옛 관동 대지진 때 수천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더 겁이 났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원폭 투하 때 다친 허리 때문에 고생했고, 지금은 전신이 아플 정도"라고 호소했다.

이처럼 국내에 생존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전원을 대상으로 증언 수집을 시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협회는 설명했다.

원폭 피해자들 실태를 알리려면 보다 내실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진태 협회 합천지부장은 "증언서를 보면 일제 때 징용이나 수탈로 일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던 한국인들이 피폭된 사실이 잘 드러나는데, 이는 곧 식민 지배가 원폭 피해로 이어졌다는 의미"라며 "정부가 이런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원폭 투하 당사자인 미국이나 전쟁 책임이 있는 일본에게 책임 있는 조치를 물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간 단체 조사로는 한계가 있는데다 피해자들이 70∼90대 고령이어서 정부 차원의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며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통한 실태 조사가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협회는 원폭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수집 활동을 당분간 계속하는 한편 향후 증언서 전산화 작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ks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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