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연대기⑥] 제국은 神聖과 기록으로 위대해졌다

입력 2017-08-05 06:00
수정 2017-08-05 13:23
[아나톨리아 연대기⑥] 제국은 神聖과 기록으로 위대해졌다

히타이트 발굴단장 "금보다 귀한 철, 실전 무기로 안 쓰였다"

"정복지 신앙, 파괴 않고 흡수"…'최초 평화조약' 등 3만개 쐐기문자판 출토



(보아즈칼레<터키>=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철기문명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신들의 부조. 한국인이 히타이트 문명에 대해 아는 건 대체로 이 정도다.

문명사에 조금 더 관심 있다면 아나톨리아 대부분과 레반트, 상(上)메소포타미아를 아우르는 제국의 지도를 떠올릴 수 있겠다. 철기문명이라 주변 청동기 지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제국이 됐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었음직하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2000년 무렵 등장해 기원전 13∼14세기에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기원전 1180년께 돌연 붕괴할 때까지 무려 800년을 유지했다.

지난달 23일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학술 교류행사인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일정으로 찾아간 터키 중부 하투샤(현 보아즈칼레)의 첫인상은 제국의 수도보다는 신들과 바위로 가득한 요새 도시에 가까웠다



히타이트의 가장 신성한 곳, 야즐르카야 바위사원은 3천300년의 시간을 초월해 불멸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태양광에 따라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부조는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방문객에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야즐르카야의 두 개 공간 중 A실에는 히타이트가 최고 신으로 섬긴 날씨(폭풍)신 테슈프(Teshup), 태양 여신 헤바트(Hebat), 이들의 아들 샤루마(Sarruma), 산의 신 '난니'와 '하지' 등이 한 무대에 새겨져 있다. 신의 이름은 상형문자로 하나하나 기록해 놓았다.

히타이트는 스스로를 '1천 신들의 나라'라고 불렀다. 정복한 나라와 지역의 신을 파괴하지 않고 모두 흡수했다. 수도에다 정복 지역의 신을 모신 신전을 세웠다. 지금까지 하투샤에서 발굴된 신전만 31곳이다.



맞은 편에는 이 신들보다 더 크고 장엄한 모습의 '투트할리야 4세 대왕'이 서 있다.

히타이트에는 왕이 죽으면 신으로 성화하는 조상숭배신앙이 있었다.

B실에 있는 샤루마신과 투트할리야 4세의 부조는 히타이트 왕조의 조상숭배신앙을 잘 보여준다. 샤루마신이 죽은 투트할리야 4세를 왼팔로 끌어안고 인도하는 모습이다.

1986년부터 하투샤 현장에 몸담은 독일고고학연구소(DAI) 소속 발굴단장 안드레아스 샤흐너 교수는 "죽은 투트할리야 4세가 신으로 성화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왕이 죽으면 신이 되므로 왕조 또는 제국의 통치가 강한 정당성을 갖게 된다"고 분석했다.





하투샤는 곳곳에 바위가 솟은 거친 땅이다. 비옥하지도 않고 교역의 중심이 될 만한 입지도 아니다.

샤흐너 단장은 히타이트가 전략적 이유로 하투샤를 근거지로 선택한 것으로 추정했다. 남동쪽 퀼테페 등 주변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피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후 아나톨리아의 작은 도시는 체계적인 계획·관리로 국제 도시로 변모했다. 신전, 저수지, 곡물저장소, 주거지 등 도시 내 공간·구조물의 목적과 출입권한 등을 세밀하게 지정하고 철저히 관리했다.

하투샤의 인구는 가장 많았을 때가 1만 5천명 정도 규모였다. 생각보다 작다.

샤흐너 단장은 "히타이트제국은 중앙집권이 아니라 연방체제로 운영됐다"면서 "수도 하투샤는 통치와 신앙의 중심지로, 제국의 두뇌 또는 심장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도시는 효율성을 추구하면서도 제국의 위엄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진입부에 건설한 40m 높이 피라미드형 언덕과 지하통로는 그 구조로 볼 때 방어용으로 보기 힘들다. 학자들은 이들 구조물이 외부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기 위한 의도로 건설된 것으로 본다. '사자 문'이나 '스핑크스 문' 같은 도시의 출입구도 히타이트의 기술과 힘을 과시하는 용도로 제작됐다고 한다.



3천300년 전 제국의 면모를 비교적 소상히 아는 건 방대한 기록이 발견된 덕분이다.

하투샤에서 출토된 쐐기문자 점토판은 약 3만개.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트로이 문명이, 스스로 남긴 기록의 부재로 정확한 위치와 통치자, 전투 실재 여부가 여전히 미스테리인 것과 대조적이다.

가장 유명한 히타이트 점토판은 '인류 최초 평화조약', 카데시 조약이다. 유엔은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실현하려는 염원을 담아 뉴욕의 유엔본부에 이 조약문을 걸어 놨다.

철기문명 히타이트 무와탈리 2세와 청동기문명 이집트의 람세스2세는 기원전 1274년 현재의 시리아 땅 카데시에서 충돌했다.

제국 간, 문명 간 전쟁은 승부를 내지 못하고 기원전 1269년에 평화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람세스 2세와, 그 사이 왕위를 이어받은 하투실리 3세가 조약문에 서명했다.

전투가 벌어진 카데시가 히타이트제국의 땅이 된 것을 보면 결과는 무승부 또는 히타이트의 판정승이 아닐까 싶지만, 람세스 2세는 귀국 후 카르나크 신전에 '대승리를 거뒀다'고 기록했다.

하투샤에서 쐐기문자판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히타이트를 패배자로 기억했을 것이다.



하투샤를 다 둘러봐도 한가지 의문이 안 풀렸다. 청동기 문명을 압도했다는 철제무기는 어디 있는가.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샤흐너 단장은 "히타이트는 무기로 쓸 만큼 단단하게 철을 가공하지 못했기에 실전에서 철기 무기가 안 쓰였다"고 했다.

철은 금보다 귀했다. 출토된 철제품은 조그마한 형상이나 장신구들이다.

힘의 원천은 철제무기가 아니라 철을 다룰 정도로 높은 기술·지식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또 신성함과 위엄으로 제국을 호령한 히타이트의 통치술과 성취는 쐐기문자판에 새겨졌기에 신화가 아닌 역사로 3천3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전한다.

tr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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