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중앙은행 앞에 들어선 노숙자 텐트촌…밤엔 피아노 연주도
시드니 대표 번화가에 텐트 40여동…당국은 책임 전가 중
(시드니=연합뉴스) 김기성 특파원 = 호주 시드니의 대표적 번화가에 노숙자들의 텐트촌이 최근 형성돼 관계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40여 동의 텐트가 거리를 점령한 이 텐트촌에서는 피아노가 준비돼 밤이면 연주가 펼쳐지기도 하고 간이 책꽂이도 마련돼 책도 꽂혀 있다.
텐트촌은 시드니 최고 도심인 마틴 플레이스 거리 한쪽의 역 앞, 그리고 호주중앙은행 바로 앞에 마련됐다. 주변에는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의회와 대법원 등 행정기관을 비롯해 주요 방송사와 기업의 본사들이 몰려 있다.
많은 사람이 통행하는 거리인 만큼 우연히 지나던 국내외 관광객 등 일부는 흥미롭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한다.
텐트촌은 중앙은행 건너편 건물이 지난해 말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그쪽의 노숙자들 일부가 옮겨오고 텐트 한두 동이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당국이 방치하는 사이 텐트는 계속 늘면서 지금 같은 텐트촌을 이루게 됐다.
한쪽에는 빵과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간단한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천막이 설치됐고, 신발과 의류도 필요한대로 가져가도록 준비돼 있다.
노숙인 대표로 '마틴 플레이스 시장'도 뽑혔다. 음주나 마약은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지만, 가끔 일어나는 소동은 피할 수 없다.
천막 안에서 음식물 공급을 담당하는 오토는 "주변 카페 등에서 하루 영업을 마치며 남은 빵 등 음식을 지원하고 있고 기부금도 들어온다"며 "지원단체들 도움을 받아 계속 버티면서 우리 사정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이 제공한 거처로 옮긴 사람도 있지만, 현재 있는 이들은 임시 숙소보다는 더욱 안정적인 거처를 요구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부는 대표적 번화가 중에서도 중앙은행 앞이라는 점에 착안, 시드니의 노숙자 문제를 알리겠다며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최근 언론 취재도 부쩍 늘었다.
텐트촌이 크게 확대돼 도시 미관을 해치고 통행을 방해한다는 불평이 나오면서 당국에는 골칫거리가 됐다.
하지만 주정부와 시드니 시 측은 책임을 떠넘기며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글래디스 베레지클리언 NSW 주총리는 최근 주의회에서 "우리 직원들이 거기에 41번이나 갔다"며 "텐트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텐트촌 문제는 시드니 시가 맡아야 하는 만큼 철거에 나서도록 시장에게 전화했다"고 밝히며 시드니 시가 나설 차례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클로버 무어 시드니 시장은 노숙자를 쫓아낼 권한이 없다며 한발 물러선 채 적절한 주택 제공 없이는 노숙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태도다.
무어 시장은 "우리는 구조물을 옮겨 장소를 안전하게 할 권한이 있지만, 사람들을 이동하게 할 권한은 없다"며 경찰이 그 권한을 가진 만큼 주정부 측이 직접 경찰에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어 시장은 또 주정부가 저렴한 공공주택을 팔아치우는 반면 사람들이 감당 가능한 가격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양측이 악역 맡기를 꺼리는 가운데 NSW 경찰은 2일 시 당국이 노숙자들을 이동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며 요청이 있으면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혀 조만간 철거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cool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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